몇 달 전 어느 정부기구의 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다. 1시간 남짓 회의를 한 뒤 점심시간이 임박해지자 주최 측은 무슨 에피타이저라도 내놓듯 성악 공연을 준비했다고 알렸다. 이어 모 대학 교수라는, 젊고 체격도 좋은 남자성악가가 무대(랄 것도 없지만)에 올라섰다. 당당했다.
그는 일단 피아노 반주에 맞춰 우렁차게 한 곡을 불렀는데, 무슨 곡이었는지는 잊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다 보면 꼭 어떤 부녀의 대화가 생각난다(식당에서 함께 돈가스를 먹을 때 음악이 흘러나오자 딸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빠, 이게 무슨 곡이에요?” “응? 그것도 몰라? 이거 돼지고기잖아!” 하는 이야기).
그는 한 곡을 부르고 나서 “제 목소리가 뭔지 아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다들 밥 먹고 와인 마실 생각밖에 하지 않고 있는데 성가시고 귀찮게 질문은 무슨! 하여간 뭔가 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챈 사람들이 테너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고 “바리톤!” 하고 외쳤다. 그러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리톤이 아니라 베이스입니다. 베이스!”라고 했다.
영어로 베이스(bass), 이탈리아어로는 바소(basso). ‘깊다’는 뜻을 지닌 이 단어는 ‘굵은’ 또는 ‘낮은’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바수스(bassus)에서 파생됐다고 한다. 굵고 낮고 깊은 남성의 목소리여서 왕이나 권위적인 아버지, 악마, 이런 역에 잘 어울린다. 성악가들에게는 몸이 바로 소리 통이다. 베이스들은 다 체격과 몸통이 크다.
좌우간 그는 자신이 베이스라고 소개하고는 친구들이 걸핏하면 이렇게 묻는다고 말했다. “야, 넌 그만큼 노래했으면 이제 테너도 할 때쯤 되지 않았냐? 넌 왜 만날 베이스만 하니?” 칼 들고 ‘스테키(스테이크)’ 자를 생각만 하고 있던 사람들이 와 웃었다.
아무리 무식하기로서니 진짜 그렇게 말했을까 싶지만 청중을 즐겁게 하려는 베이스의 노력이 그럴 듯해 사람들은 그의 말에 박수 치며 웃는 것으로 베이스를 넣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같은 기구의 회의 중간에 이번에는 소프라노가 등장했다. 그녀는 네 곡을 부르고 나서 우리 테이블에 함께 앉아 식사를 했다. ‘테너도 못 되는 그 가엾은 베이스’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녀도 소리통이 큰 몸집에 어울리게 크게 웃었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나이가 들면 성대도 괄약근이 약해져 목소리가 변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소프라노가 메조소프라노가 되고 메조소프라노가 앨토가 되는 수는 있어도 앨토가 소프라노가 되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성악가의 경우 타고난 음역보다 조금 더 높은 소리를 내는 것은 가능해도 타고난 음역보다 더 낮은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목소리를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은 세월이지만, 늙어서 낮아지고 처지는 목소리는 이미 의미 있는 음악의 목소리는 아니다.
그러니 억지로 테너인 척하고 베이스인 척할 필요 없다. 특히 폼 잡고 무게 잡으려고 턱을 당겨 굵은 가성을 내는 사람들을 나는 결사적으로 싫어한다. 그러지 말고 그냥 제 목소리 생긴 대로 살아라.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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