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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盧 대선 때 선거전략통 우리 당시절 非盧탈당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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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盧 대선 때 선거전략통 우리 당시절 非盧탈당 주도

입력
2013.05.05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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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김한길 대표는 소설가 출신 4선 의원으로 김대중ㆍ노무현 대선 후보의 선거 캠페인을 기획한 대표적 '선거전략통'으로 꼽힌다.

김 대표는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여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으나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 대신 김대중 총재가 이끌던 새천년민주당을 선택해 정계에 입문했다. 진보정당 발전에 매진한 선친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의 영향을 받은 탓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김 대표는 등을 히트시킨 베스트셀러 작가 겸 TV 토크쇼 진행자로서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이듬해인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의 선거 캠페인을 기획, 총괄하면서 김대중 정부 출범의 주역으로 평가받았다. 사상 첫 도입된 후보들간 TV토론회가 주요 대선 변수로 떠오른 상황에서 김 대표가 김대중 후보의 방송대책팀장을 맡아 '미디어선거전'을 성공적으로 치렀기 때문이다. 이후 국민의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기획수석과 문화관광부 장관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2002년 대선에서도 노무현 후보의 미디어선거대책 특별본부장을 맡아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를 성사시키는 등 '선거기획자'로서의 명성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김 대표는 국회에서도 여야 간 타협을 이끌어내는 수완을 발휘했다. 17대 국회 건설교통위원장 시절 여야간 쟁점 법안인 행정중심복합도시법 처리를 성사시켰고,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시절인 2006년 1월 당시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와의 산상회담을 통해 사학법 문제로 장외투쟁 중이던 한나라당의 원내 복귀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열린우리당 내 비노무현계 의원들의 집단 탈당을 주도한 경력은 아직까지도 친노무현계로부터 '분열의 리더십'이란 비판을 받는 계기가 됐다. 당시 그는 열린우리당을 떠나 중도통합민주당을 창당한 뒤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참여한 구(舊) 민주당과 통합해 대통합민주신당을 탄생시켰다. 이런 점 때문에 경선 과정에서도 민주당의 최대 난제인 계파를 아우르면서 당 혁신을 주도할지에 대해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김 대표는 17대 대선 이후 패배의 책임을 지겠다며 2008년 18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으나 지난해 19대 총선에서 서울 광진갑에 전략 공천돼 4선 의원으로서 국회에 재입성했다. 지난해 6ㆍ9 전당대회에선 11곳의 지역경선에서 7곳에서 1위를 차지하며 선전했지만 친노진영의 이해찬 전 대표에게 분루를 삼켰다. 지난해 11월엔 대선 승리를 위한 인적 쇄신을 내세우며 지도부 동반사퇴를 주장했다가 수용되지 않자 홀로 최고위원 직에서 물러나 결국 지도부 총사퇴 요구를 관철했다.

김 대표의 선친은 김철 전 통일사회당 당수로 한국 정치사에서 '부자(父子) 당수'의 진기록도 탄생했다. 김철 전 당수는 71년 7대 대선에서 진보정당인 통일사회당 후보로 출마해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경쟁했었다. 이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과는 선대에 이어 2대째 여야 영수로 재회하는 보기 드문 인연을 나누게 됐다.

● 김한길 대표 프로필

▲탤런트인 부인 최명길씨와 2남 ▲일본 도쿄 출생(60) ▲이대부고, 건국대 정외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대변인 ▲청와대 정책기획수석비서관 ▲문화관광부 장관 ▲국회 건설교통위원장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중도통합민주당 공동대표 ▲15ㆍ16ㆍ17ㆍ19대 의원 ▲민주통합당 최고위원

김회경기자 herm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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