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지평선] '전통' 깊은 시험부정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지평선] '전통' 깊은 시험부정

입력
2013.05.05 12:03
0 0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추정되기도 하는 유명한 10폭짜리 옛 그림 가 있다. 돌잔치부터 회혼례에 이르는 일생의 큰 일들을 그렸다. 이 중 1차 과거시험인 소과(小科) 시험장을 묘사한 풍경이 황당하다. 여기저기 일산(日傘) 밑에 자리 깔고 앉은 선비들이 서로 답안을 넘겨보고, 심지어 몇몇은 머리 맞대고 답안을 상의하는 모습도 보인다. 한마디로 시험장 같지 않은 난장판이다. 나라 기강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 18세기 말이어서 이 모양인 게 아닌가 싶다.

■ 이렇게 대놓고는 아니어도 과거시험 부정은 조선 초부터 내내 골치거리였다. 태종실록서부터 무시로 커닝 기록이 튀어나온다. 머리나 버선 속에 커닝페이퍼를 숨기는 건 기본이고, 대리시험이나 답안지 바꿔치기도 흔한 수법이었다. 숙종실록엔 한 아낙이 땅에 삐죽 나온 노끈자락을 잡아당겼더니, 땅 속에서 딸려 나오는 빈 대나무 통이 성균관 과거시험장까지 연결돼있더라는 기록도 있다. 문제와 답안을 노끈에 묶어 대나무 통 속으로 주고받았던 것이다.

■ 물론 조정도 부정을 막느라고 골머리를 앓았다. 과장 입구에서 몸을 뒤져 붓, 먹, 벼루 외에는 일절 갖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수험생끼리는 사방 2㎙쯤 띄어 앉히고 서로 넘겨보지 못하게 칸막이를 세운 뒤 감독관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옷에 깨알같이 써오는 걸 막으려 흰옷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부정이 적발되면 응시자격을 일정기간 박탈하거나 곤장, 징역, 유배 등 중형으로 다스렸다. 그래 봐야 결사적인 합격욕심 앞에선 백약이 무효였다.

■ 한국이 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SAT) 문제유출로 망신을 당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동시 치러지는 시험의 시차(時差)를 악용해 문제를 미리 빼낸 정황이 드러난 때문이다. 과거 여러 차례 비슷한 일로 수사를 받고, 성적이 취소된 일은 있으나 이번처럼 아예 시험취소는 세계적으로도 처음이란다. 아마 동서를 막론하고 커닝의 역사는 시험의 역사와 같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여전히 우리는 유별나다. 단판 시험으로 인생이 갈린 과거제도의 질긴 유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준희 논설실장 jun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