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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만드는 정치인도, 법 다루는 로펌도, 불법인 우리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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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만드는 정치인도, 법 다루는 로펌도, 불법인 우리를 쓴다”

입력
2013.05.03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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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4월 어느 날 밤 9시 서울 서초구 논현동 한 유흥가. LED 조명들로 어수선한 거리의 인파를 뚫고 검은색 에쿠스 승용차 한 대가 10층 빌딩 앞에 섰다. 건물에는 부동산 컨설팅 회사와 고급 술집 등이 입주해 있었다. 170㎝쯤 되는 키에 다부진 체격과 눈매의 한 사내가 차에서 내렸다. 연이어 검은 양복의 남자 서넛이 건물에서 나와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 없다는 듯 90도 인사를 했고, 사내는 그들의 허리가 펴이기도 전에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얼마 뒤 한 유명 조직폭력배 보스를 동원한 청부폭력으로 구속된 그 남자의 당시 직함은 D그룹 부회장이었다.

그날 ‘사립탐정’ 김형도(가명ㆍ55)씨는 그 장면을 길 건너편 차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미국의 한 사업가로부터 사업 파트너로 협상 중이던 그 남자의 신원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은 터였다. 그는 누구나 알만한 중견기업 간부여서 처음에는 간단한 신원 확인 정도로 여겼는데, 그 장면을 본 순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더라고 했다. “인터넷을 뒤져도 인터뷰 기사 하나 없고, 미행도 쉽지 않은데다, 어렵게 확보한 주민등록번호로 신원조회를 했는데 전혀 엉뚱한 사람이 나왔어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죠.” 추적 보름쯤 뒤 그는 친분 있는 한 형사에게 연락, ‘냄새’가 난다며 자신이 확보한 정보들을 건넸고, 경찰 조사 결과 그는 수배 인물로 드러났다. “가명을 쓴 데다 성형수술을 하고 몸집까지 불렸더군요.”김씨의 의뢰인은 투자 계획을 백지화했고, 얼마 뒤 남자는 조폭이 연루된 사기 사건으로 검거됐다.

결과가 좋아 별 탈은 없었지만 사립탐정 김씨의 활동 가운데 상당부분- 미행, 도촬, 신원 조사 등-은 범법행위였다. 아니 그의 존재 자체가 사실상 불법이다. 신용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은 ‘특정인의 소재를 알아내거나 금융 거래 등 상거래관계 외의 사생활 등을 조사하는 일을 신용정보 회사 등이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법 40조 5항은 ‘정보원, 탐정, 그밖에 이와 비슷한 명칭을 사용하는 일’ 자체를 금하고 있다. 경찰청은 전국의 심부름센터가 1,547개(3월 현재)에 이르며, 그들 중 상당수가 불법ㆍ탈법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립탐정으로 활동중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치인, 로펌, 기업도 우리의 고객”

“어지간한 ‘선수’들은 모두 잠수 탔어요.”서울 구로구의 사무실에서 만난 김씨는 “지난해 9월 이혼을 요구하는 재력가 아내를 심부름센터를 통해 청부살인한 사건이 터진 뒤 단속이 심해졌다”고 “ 지금은 대부분 개점휴업 상태이고, 현재 활동하는 이들은 돈 되는 일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김씨의 주특기는 부동산 조사. 구입하려는 땅 주인을 대신 찾아주거나 조상의 숨겨둔 부동산 따위를 조사하는 일 등이다. 그러다 아예 사립탐정으로 전업했다고 했다. 행정력이나 사법 권력이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다양한 시민적 요구가 있고, 그 수요에 호응하는 일이 돈도 되더라는 것. 취재 도중 만난 사립탐정들도 “우리는 법이 어떻게 규정하고 있든 이미 오래 전부터 다방면에서 활동해왔다”고 말했다. 언론사, 로펌, 기업, 심지어 정치인들까지 은밀히 그들을 찾고 있다. 김씨는 “취재가 급한 방송사가 사건 관계자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거나 선거철 정치인이 상대 후보의 약점이나 비리를 잡아 달라고 의뢰하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또 다른 사립탐정 유제일(가명ㆍ48)씨는 “변호사들이 증거 수집이나 목격자 확보 등을 부탁한다. 아예 사립탐정을 사무장으로 고용하거나, 파트너십을 맺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 한다”

사립탐정 고용 비용은 업무 성격이나 탐정 몸값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대략 하루 평균 50만~70만원이 든다. 착수금 얼마에 성공수당 얼마 식이다. 그들은 ‘불법적인 일은 안 한다’고 공언하지만 ‘돈 되는 일은 다 한다’는 게 더 사실에 가깝다. 개인정보 확인, 도청, 위치추적은 예사고, 청부 폭력을 하는 이들도 있다.

서울 동대문에 사무소를 둔 김대규(가명ㆍ42)씨는 얼마 전 한 부동산 컨설팅 회사의 의뢰를 받았다. “매물 정보, 고객 정보가 줄줄 새 나가는데 여직원이 스파이 같다”는 거였다. 요원 3명이 24시간 밀착 감시를 시작했고, 여자 집에 도청기까지 설치했지만 혐의를 찾지 못했다. 그는 “혹시 싶어 사장 사무실을 조사했더니 유선전화기에서 도청기가 나왔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김씨는 “인터넷이나 세운상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소형 도청기라 웬만해선 걸리지 않는다. 마우스, 스피커, 계산기 등 주변에 있는 모든 물품에 도청기를 달 수 있다”며 “결국 범인은 못 찾았지만 정보 유출은 막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립탐정 유제일씨는 ‘에르메스 꽃뱀’사건을 해결했다. “작년 6월 한 여성이 찾아와 의사인 남편의 불륜 상대를 찾아달라고 의뢰했다. 대치동에서 영어 강사를 한다는 여자였다. 학원가를 샅샅이 뒤졌지만 해당 여자는 없었고, 아내가 확보한 여자의 전화번호로 ‘정보책’을 통해 신상을 팠지만 말소된 주민등록번호에다 이름은 가명, 국적조차 필리핀인 것으로 드러났다. 한 마디로 ‘신분 세탁’을 한 여성이었다. 유씨는 아내를 통해 남편의 스마트폰을 잠깐 훔치도록 한 뒤 SD카드를 복구, ‘에르메스 핸드백 하나 사주면 안돼요?’ ‘부인에게 걸리면 안되니깐 카톡 메시지는 모두 지워요’ 등의 메시지와 함께 밀회시간과 장소를 교환한 문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현장을 덮쳐 캐물어보니 한국에서 남자를 유혹해 돈을 뜯고는 필리핀으로 도망치는 꽃뱀이더라”고 말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사설탐정에 대한 사회적 수요는 있는데 관련 법규가 없어 불법이 오히려 조장되는 측면이 있다. 권한 등을 엄격히 해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선에서 사립탐정을 합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현재 국회에는 민간조사원(사립탐정)의 자격과 업무범위를 제한하는 민간조사업 관련법 두 개가 상정돼 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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