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산 군데군데 잔설이 살짝살짝 보일 정도로 강원도 산골의 봄은 더디 오지만 그래도 동네 여기저기에 파릇파릇 새순과 함께 알록달록 꽃봉오리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걸 보니 이제 본격적인 봄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검 짙은 논과 밭에 툭툭 던져진 하얀 비료 포대들은 묘한 구성미를 보여줍니다. 집 마당 구석에서, 농기계 창고에서 기운차게 경운기를 꺼내어 돌려보고 말썽부리는 부분을 수리합니다. 이장님의 트랙터는 마을길로 왔다갔다 갑자기 분주해집니다. 시커먼 비닐들은 허물 벗듯 시원스레 벗겨집니다. 방목하는 소도 이제 초지로 나갈 준비들을 합니다. 겨우내 웅크렸던 몸과 마음의 기지개를 펴고 기운을 차리려 하는 것은 사람이나 마을이나 자연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민박집 주인들은 대청소에 이불 빨래에 본격적인 손님맞이 준비입니다. 겨우내 부엌 한구석에 있던 바비큐 판도 닦아 손질을 합니다. 이제는 슬슬 밖에서 구울 수 있다는 신호입니다. 마을의 찻집은 향긋한 커피와 함께 봄에 어울리는 차를 준비해 놓습니다. 주민이 운영하는 민박과 찻집은 어느 귀한 손님을 모셔도 자신 있습니다. 이웃집 개는 새끼를 여덟 마리나 낳았습니다. 아직 이름이 없어 얘들아 하고 부르면 우르르 몰려오는 게 너무 귀엽습니다. 마을 교회의 심방도 봄을 맞아 재개되니 목사님은 벌써부터 집집마다 챙겨줄 음식과 다과에 과식 걱정입니다.
단오 전에 땅에서 나는 푸른 것은 다 먹어도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역시 봄에는 나물입니다. 산채가 특산인 윗마을은 햇 산나물 출시에 여념이 없습니다. 곰취, 곤드레에 두릅, 참나물은 이 때 꼭 맛봐야 합니다. 푸짐한 찰밥에 갖가지 산나물을 넣고 집에서 담가 둔 고추장에 쓱쓱 비벼 먹는 비빔밥은 와구와구 집어넣어도 기분 좋게 든든합니다. 된장을 확 풀어넣은 까슬까슬한 엉겅퀴국은 겨우내 장 속에 머물렀던 찌꺼기를 싹 긁어내는 것 같습니다. 꼭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도 잠시 봄날만큼은 나물 먹는 즐거움에 푹 빠져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마을을 휘돌아 있는 임도는 따뜻하고 촉촉한 흙 내음과 봄기운을 흠씬 쐬기에 제격입니다. 낑낑대고 힘들여 정상 정복을 하는 수직 등산이 아니어도 다양한 수종의 평탄한 숲길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한 바퀴 돌고 나면 기분도 상쾌합니다. 떴다! 겨우내 기다렸던 패러글라이딩 장에는 마음 급한 파일럿들이 봄 하늘을 수놓습니다. 쏜살같이 내빼는 산악자전거 동호회들의 질주는 보는 이도 시원합니다.
볼 건 많지만 살 건 없다는 게 시골 장터이지만 그래도 겨우내 을씨년스러웠던 읍내 장터는 봄과 함께 활기를 띱니다. 시간을 잘 맞추면 오일장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각종 묘목과 꽃, 산나물 천지는 봄 장의 자랑입니다. 한 켠에 쭈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가 안쓰러워 다해야 만원도 안 되는 채소들을 완판해 드리고 나면 주위 할머니들의 부러움이 가득합니다. 시장에서 만나는 기운찬 장꾼들의 넉살과 뜻밖의 공연도 볼만합니다.
이 활기차고 건강한 것들을 시골 마을에서는 원스톱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농촌관광이다 생태관광이다, 공정여행에 슬로투어까지 관광과 여행의 형태가 날로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리조트나 관광지가 아닌 농촌으로 놀러 오는 이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농촌 특유의 생태자원과 웰빙형 콘텐츠들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농촌이 갑자기 테마파크나 유원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 농사일과 생업에 바쁜 주민들이 능수능란한 서비스 요원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는 듯 가는 듯 살그머니 마을에 들어와서 잠시 주민이 되어 보겠다는 소박한 생각이 필요합니다. 이른바 장소와 관계의 체험입니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차일피일 미루다 놀기 좋은 계절 다 지나가니 봄나들이는 서두르는 게 좋습니다.
이선철 용인대교수·감자꽃스튜디오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