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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춘추가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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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춘추가 없어졌다"

입력
2013.05.01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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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여러 사람이 모여 점심을 먹는데 너무 더워서 환장 된장 고추장할 지경이었다. 4월 하순인데도 계속 춥다가 갑자기 기온이 올라간 데다 사방 문이 다 닫힌 방에서 갓 해온 돌솥밥을 먹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다. 게다가 그 날사말고 넥타이까지 매고 나갔으니 체온 자체가 2~3도는 더 올라간 것 같았다.

유난히 더위를 타는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덥다고 해 문을 열긴 했지만 바람이 통하는 곳이 아니어서 별 차이도 없었다. 결국 참다 못해 넥타이를 확 풀고 수건으로 연신 땀을 닦았다. 그런데 내 옆에 앉은 사람은 뭐가 문제냐는 듯 넥타이도 풀지 않고 땀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그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괜히 얄미워져서 “이분은 불한당이네요!”그랬다. 사람들이 와 웃었다. 불한당은 ‘떼를 지어 돌아다니며 재물을 마구 빼앗는 사람들의 무리’라는 뜻인데, 영어로는 hooligan으로 번역되나 보다. 좋은 말이 아니다. 그러나 불한당의 한자 不汗黨 중에서 汗은 ‘땀 한’자이니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불한당 아닌가.

자연히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날씨 이야기가 이어졌다. 한 사람이 “우리나라도 이제 봄 가을 없이 여름과 겨울만 있게 됐나 봐.”라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맞아요. 덥다, 춥다고만 해야 될 것 같아.”라고 받았다. 지난 겨울에는 눈도 많이 오고 하도 추워 삼한사온(三寒四溫)은 없어지고 삼한사냉(三寒四冷)으로 바뀌었다는 말도 했었다.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한자를 분리하거나 결합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측자파자(測字破字)가 생각났다. 예를 들면, 사계절이 봄 같다는 四季如春(사계여춘)이라는 말이 있다. 이게 무슨 뜻인가? 언제나 봄 같으면 늘봄 아닌가. 그런 뜻에서 이 말의 정답은 청춘이다. 청춘을 이렇게 문자로 풀어 말한 것이다.

‘壬子(임자)’라는 소설이 있다. 이게 어떤 작품인가? 두 글자를 각각 쪼개서(파자) 생각하면 壬은 千一이 되고 子는 자시를 말하니 한밤중이라는 뜻을 갖는다. 좀 더 유추하면 천일야화(千一夜話), 즉 ‘아라비안나이트’가 된다. 측자파자는 이런 식으로 수수께끼 내듯 재치와 유식을 자랑하며 겨루는 문자유희다.

측자파자를 생각하게 된 것은 無冬無夏(무동무하)라는 말 때문이었다. 겨울이 없고 여름도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봄과 가을만 있는 거지. 그러면 어떻게 되나? 바로 春秋(춘추) 아닌가. 무동무하는 공자가 엮은 것으로 알려진 중국의 사서‘춘추’를 가리키는 옛날 학생들의 은어였다. 알고 보면 너무 단순해 지금 감각으로는 정말 개그도 안 되는 수준처럼 보이지만.

그런데 이제 우리는 무동무하가 아니라 無春無秋(무춘무추), 봄과 가을이 없는 날씨를 견디며 살아야 하게 됐다. 딱한 일이다. 공자는 바로 춘추필법의 정신으로 그 책을 엮었다는데, 지금 사람들은 봄과 가을이 없으니 춘추필법은커녕 夏爐冬扇(하로동선)의 자세와 행태로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닌지. 하로동선은 여름의 화로와 겨울의 부채, 즉 아무 쓸모없는 말이나 재주를 말한다. 춘추가 없어지면 더 이상 덧없는 나이나 들지 않으면 좋겠는데.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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