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이 출중한 비밀정보요원 B씨.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도청을 당하면서 그의 작전은 줄줄이 실패한다. 애인의 치과에서 받은 충치 치료 과정에서 뭔가 심어진 것 같지만 그 곳으로 다시 갈 수도, 누구한테 이야기할 수도 없다. B씨가 찾아간 곳은 전파연구소. 외부 전파가 전혀 닿지 않은 이 곳의 전파무향실에서 근무하는 친구의 도움으로, 치아에 삽입된 초미니 도청장치를 은밀히 제거한 뒤 스파이들을 일망타진한다.
첩보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전파무향실은 사실 산업현장에선 이미 일반화됐고, 특히 자동차 연구에선 없어서는 안 될 곳이다. 차량의 거의 절반이 전자부품으로 채워지는 전장화(電裝化)가 빠르게 진행됨에 따라, 자동차 안전에 중요한 전자파 연구에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내 최대 전파무향실을 갖춘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를 최근 찾았다. 연구동 1층에 자리한 전파무향실은 버스까지 넣고 시험할 수 있는 길이 31m, 폭 22, 높이 11m의 밀실로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시설이다. 전자파 반사가 없도록 천장 벽 등 내부가 특수 처리되고, 바닥과 외벽 등 6면은 강판으로 처리돼 외부 전파 유입도 막아 놓았다.
양승완 전자시스템 개발실장은 1일 "전자파는 인체에 해를 줄 뿐만 아니라 다른 전자기기를 교란시켜 오작동을 야기하기도 한다"며 "자동차 전장품들이 서로 간섭 받지 않고 제 기능을 하는지 연구하는 곳"이라고 소개했다.
이 곳에선 라디오와 내비게이션, 에어백, 차체 제어장치, 타이어 공기압 경보장치 등 편의ㆍ안전 전자기기들이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제대로 작동하는지 테스트 한다. 기자가 방문했을 때 갖가지 종류의 내성 테스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이 차량에 장착된 전장품들을 다양한 조합으로 작동시킨 뒤 방해 전자파를 쏘아 작동 여부를 보는 시험이었다. 이희훈 책임연구원은 "자동차는 냉장고 등 집안의 가전제품과 달리 주행환경이 수시로 바뀌고, 전자파가 많이 나오는 방송송신탑과 고압선 주변을 달릴 때도 있기 때문에 더 강력한 전자파 방호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테스트 결과의 이상 유무는 폐쇄회로(CC)TV를 통해 차량 상태와 계기판 반응을 살피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이 책임은 "전파무향실 내부는 전자레인지에 비유될 정도로 위험하다"며 "바깥 조종실에 설치된 CCTV 모니터로 확인한다"고 말했다. 특히 설치된 카메라 등 각종 계측 장비에서 발생하는 전자파를 줄이기 위해 이들 장비들은 모두 전자파가 없는 광케이블로 연결됐다.
요즘 자동차는 기계라기보다는 거의 전자제품에 가깝다. 자동차 내부 부품끼리는 물론이고 자동차와 자동차, 자동차와 도로 등 교통인프라 간의 통신도 요구되는 상황이어서 전자파 검증의 중요성은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양승완 실장은 "카오디오, 헤드라이트 개발이 업무 전부이던 입사초기(87년)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고 말했다. 연구원의 1%에 불과하던 전자공학도의 비율이 10%를 넘기고 있는 것도 자동차의 전장화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가장 진일보한 기아 K9 값의 30%가 전장품 값이고 전기차 시대가 오면 이 비율이 70% 이상 될 것"이라며 "'하이마트'에서 차를 사는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민승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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