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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수원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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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수원아이

입력
2013.05.0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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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야, 손해야, 손해야, 어디 있는 거냐!"

할머니가 마당에 나와 목청껏 며느리를 부르는 소리였다. 할머니 며느리는 고향이 경기 수원 어디라고 하였다. 할머니의 사투리 발음은'수원애'라고 부른다는 것이 번번이'손해야'가 되었다. 아주머니를 볼 때마다 나는 손해 보는 사람을 떠올렸다. 손해보고 사는 사람.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 손해 볼 것이 확실한 사람. 손해 본 것이 억울해 뒤꼍에 나가 울먹이는 사람. 가끔 집을 뛰쳐나가는 사람. 아주머니는 수원아이가 되기 위해 더 이상 손해 보지 않기 위해 친정집으로 도망가는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며느리가 집을 나갈 때마다 아들의 등을 떠밀었다. 자신이 밥하고 빨래하고 농사일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색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아저씨가 처갓집으로 갔다.

아주머니를 앞세운 아저씨는 개선장군이었다. 거나하게 취해 노래를 흥얼거렸다. 기껏해야 삼사일을 손해 보지 않고 산 아주머니가 돌아왔다.

그날 밤에는 어김없이 고깃국 끓이는 냄새가 동네에 퍼졌다. 그 집 뒤꼍 감잎에 맺힌 이슬이 떨어지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렸다.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왔다.

그 집 뒤꼍에는 단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땡감일 때 먹어도 떫지 않은 감이 열리는 나무였다. 단감나무 곁으로 다가갈 때마다 아줌마가 떠올랐다. 언제나 손해를 보고 사는 아주머니의 흐느낌이 들렸다. 견디다 견디다 못 견디겠으면 잠시 집을 나가는 아주머니.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다시 손해 보는 자리로 돌아오는 아주머니. 내가 멀리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면 약간 뒤틀린 입으로 웃어주던 아주머니. 얼굴에 파랗게 멍을 달고 사는 아주머니였다.

내게는 아주머니 얼굴을 오래 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힐끔 쳐다보고 외면해버린 아주머니 얼굴에서 언뜻 지나가는 웃음을 보았다. 나는 언젠가는 아주머니에게서'수원아이'시절의 이야기를 듣고만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주머니에게"안녕하세요?"란 인사밖에 할 수 없었다. 아주머니에게 무언가를 원한다는 건 아주머니에게 손해를 끼치는 거나 다름없어 보였다.

언젠가 아주머니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오른쪽 다리를 절면서 걸어가는 뒷모습이었다. 헐렁한 엉덩이 부분에 부기처럼 엉겨있는 황토물, 수건을 똬리 틀어 깐 머리에 인 고무대야에서 고구마 순이 비죽비죽 올라와 있었다.

그 집 사람들이 일을 나간 사이, 나는 그 집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그 집 변소는 나의 도서관이었다. 예전에는 제법 떵떵거리며 살던 집안이어서 할머니가 낳은 자식들은 공부를 많이 했다. 그 집 변소의 박스에는 항상 책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집 변소에 들어가서 책장이 휴지로 뜯겨나가기 전에 책을 빌리곤 했다. 빌린 책을 반납하고 새로 읽을 책을 골라 가슴에 품었다. 그곳은 지독한 냄새의 소굴이어서 숨을 참아야 했다. 나는 언제나 빌린 책을 빠짐없이 기한 내에 반납하는 우수이용객이었다.

나는 그 집 다락방에 무슨 책이 얼마나 더 있는지 궁금했다. 책장이 누렇게 탈색된 세로쓰기 소설책들은 학교 도서관에는 없는 것들이었다. 구더기가 기어 나오고 혹독한 냄새가 송곳으로 코를 쑤셔대는 그 집 변소를 찾아갈 때마다 나는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스쳐 지나가는 속웃음을 느꼈다. 아주머니는 내게 아득한 물음표였다.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물음표였다.

어느 날, 내가 호두나무에 올라가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아주머니가 책 몇 권을 꺼내와 마당에서 책 먼지를 털어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먼지를 털어낸 책을 들고 오른쪽 다리를 절면서 변소로 향했다.

그 집 다락방에 있는 책들을 변소로 옮겨놓는 건 아주머니였다. 내가 만나보지 못한, 아니 영원히 만날 수 없는'수원아이'의 짓이었다.

이윤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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