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당시 한국인들을 강제징용한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이 지난해 대법원에서 여운택(90)씨 등 징용피해자에게 손해배상을 하라는 취지의 판결을 받은 뒤 파기환송심에서 시간끌기 전략으로 배상을 미루고 있다. 고령의 피해자들이 오래 버티기 어려운 상황인데도 재판은 1년 가까이 늘어지고 있는 상태다.
2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민사19부(부장 윤성근)는 지난해 6월 중순 사건을 접수하고 즉시 재판 절차에 들어갔다. 그러나 3일 뒤 신일본제철 측 변호인인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의 주모씨 등 3명이 돌연 사임서를 제출하면서 재판이 공전되기 시작했다. 특별한 설명도 없이 시간을 흘려보낸 신일본제철 측은 9개월이 지난 3월에야 주씨 등 변호인 3명을 그대로 재선임했고, 재판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후에도 신일본제철 측의 재판 지연 시도는 계속됐다. 변호인단은 "일본제철(신일본제철 전신)의 한 특수관계 법인에 있는 자료를 한국 법원이 문서촉탁신청을 통해 받아 달라"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원칙적으로 피고 측에 도움될 자료라면 피고가 확보해 제출해야 한다"며 이들의 주장을 배척했다.
신일본제철 측은 이어 "일본의 재판 관계자에게 소송고지를 해 달라"고 요구했다. 소송고지란 재판과 관련 있는 3자에게 소송이 진행 중임을 재판부가 알리는 제도다. 재판부는 "국내 민법에는 없는 규정"이라며 "문서촉탁신청과 소송고지 요구 모두 재판 절차를 남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신일본제철 측은 다시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피해자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할 외국법 전문가를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관련 논문을 담은 의견서를 통해서도 충분히 입증이 가능하다"고 설득했으나, 이번엔 전문가가 외국인이기 때문에 의견서 작성에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결국 재판부는 5월 30일로 예정했던 선고 공판 일정을 연기하고, 6월 19일 한 차례 더 재판을 갖기로 결정했다. 재판부는 "원고들의 나이가 많아 가능하면 재판 진행을 빨리 하려 했지만, 이번 사건의 역사적 중요성을 고려해 절차적 문제가 있으면 안 된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서울고법 관계자는 "변호인 선임도 이유 없이 미루고, 이전 재판에선 언급하지 않은 절차를 파기환송심에서 강하게 주장한 것을 봐선 고의적으로 지연 전략을 펴고 있는 것"이라며 "국민적 관심사가 낮아질 것을 노린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신일본제철 측 변호인은 "재판과 관련해 (언론에) 어떤 말도 하지 않기로 고객(신일본제철)과 약속했다"며 "재판에서 나온 이야기로 알아서 판단해달라"는 말만 남긴 채 황급히 법정을 떠났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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