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아이를 키우다보면 깜짝 깜짝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어릴 때는 여자아이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주의력 탓에, 좀 자라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남자 아이 특유의 성격 탓에 잠시 아득해지기 일쑤다.
친구 관계만 해도 그렇다. 몇 년 전 어느 주말, 우리 모자는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막 중학교에 들어간 아들은 중학생이 된다는 것과 엄마와 조곤조곤 대화하지 않는 것이 동의어라도 된다는 듯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밥알만 씹고 있던 중이었다. 갑자기 벨소리가 나고 누군가 대문을 두드렸다. 우찬이였다.
우찬은 아들의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였다. 당시 아들은 외국에서 돌아와 새로 전학 간 상암동의 학교에서 6학년을 보내게 됐는데, 우찬은 아는 친구 하나 없던 아들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어오고 새로운 친구들을 소개시켜준 아이였다. 아들은 우찬이 있어 비로소 낯선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온 동네를 쏘다니는 맛을 익히게 된 것도 우찬 덕분이었다. 우찬이 아니었다면, 아들의 유년은 황폐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우찬이가 송도 신도시로 이사를 가면서 같은 중학교를 다니게 될 것이라는 둘의 바람은 깨지게 되었다. 아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을지는 미루어 짐작 가능하다. 우찬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렸던 지 주말을 맞아 가족들과 함께 신촌 할아버지 댁을 방문한 우찬은 혼자 조용히 빠져나와 시내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상암동으로 왔다. 상암동 행 버스를 본 것이 화근이었다. 부모에게 이야기하면 가지 못하게 할까봐 몰래 빠져나오는 방법을 선택한 우찬은 심지어 할아버지 슬리퍼를 신고 있기까지 했다. 신발을 갈아 신을 시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송도 국제도시에서 신촌을 지나 상암 디지털 단지로 이어지는 그날의 우찬의 행로는 이제 막 중학교에 들어간 13세 소년에게는 세계의 끝으로 가는 여행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년은 글로벌 국제도시에서 나와 자신의 근원인 올드타운을 지나 첨단 디지털 도시로 왔다. 이 여정이야말로 한 세기 이상의 풍경들이 뒤섞여 있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본질에 육박하는 모험이 아닐까.
이란 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가운데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작품이 있다. 이란 북부 도시에 살고 있는 한 소년이 우연히 자신의 가방에 넣어온 짝꿍의 공책을 되돌려주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소년이 친구 집을 찾아 헤매는 장면으로 일관한다. 고개를 넘고 물을 건너 멀리 떨어진 친구의 집을 찾아 헤매던 소년은 그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진다. 아무런 사건도, 어떤 해석도 없건만, 우리는 이 소년의 뒤로 깔리던 이란의 하늘과 땅, 그리고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세계의 변방 이란에서의 삶에 대해 어떤 암시를 받을 수 있었다.
우찬의 여로도 그와 같지 않을까. 오로지 친구와 함께 하기 위해 낯선 길도 두려워하지 않고 길 위에 나선 우찬에게 우리의 도시 서울이 마련한 풍경들은 그 이란 소년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이 사는 곳이 어떤 곳인지 알게 해주었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를 바도 없을 것이다. 어른들이 오랜 삶의 터전을 부수고 파헤치며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동안에도 소년들은 자란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싸우며 성장한다. 국제도시니 디지털도시니 뭐니 해도 그들에게 우리의 도시는 다만 그들의 집, 그들의 친구들이 살고 있는 집에 다름 아니다.
아이를 잃어버린 줄 알고 놀란 우찬의 부모들이 다시 우찬을 데리러 오기까지, 아들과 우찬은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간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며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리라는 내 예상과 달리, 둘이 각자의 게임기를 가지고 묵묵히 게임만 하도 있었다는 사실만 빼면, 이들의 우정은 충분히 감동적이다. 이 디지털키드들을 어쩌랴! 도무지 알 수 없는 게 사내, 아이들이다.
신수정 문학평론가 ㆍ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