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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눈을 내리면 만나는 은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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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에세이] 눈을 내리면 만나는 은하수

입력
2013.04.26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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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서울에서 동창 여러 명이 해미에 들렀다. 갑자기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둥지를 튼 게 궁금했는지 내려와 이틀 동안 모처럼 좁은 원룸에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친구들과 읍성을 함께 산책하면서 내아 건물 뒤, 사람들이 거의 들르지 않는,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보물창고로 안내했다. 쉰 중반을 넘고 있는 중년 사내들의 감성이 강퍅하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면 좋겠다 싶었다. 다행히 좋아하는 모습들이어서 다행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은하수를 보았다.

한낮에 은하수라니? 조금은 뜬금없겠다. 서울에서 은하수 볼 일은 이제 완전히 무망하다. 그러나 충청도 서산의 해미라고 은하수를 볼 수는 없음을 이내 알게 되었다. 천체망원경이 없으면 이젠 은하수도 볼 수 없는 세상이다. 어렸을 때 고개를 들면 밤하늘에 우유와 보석을 쏟아놓은 듯 자잘한 별들이 몽환적으로 빛나던 은하수는 이제 없다. 적어도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읍성 안을 거닐다보면 수많은 은하수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은하수는 하늘에 있는 게 아니라 땅에 깔려있다. 자잘한 들꽃들이 소금을 뿌린 듯 풀밭에 온통 깔려있다. 은하수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눈을 내려 보면 그렇게 쉽게 은하수를 만날 수 있다.

나태주 시인의 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 시인은 아이들과 함께 들꽃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장미나 튤립처럼 화사하고 큼지막한 꽃들에 먼저 눈길을 건넨다. 거기에만 끌리면 자잘한 야생화들에는 눈길도 나누지 않는다. 이름도 모르고(그러면서 '이름 없는' 들꽃이란다!) 보잘것없다고 여기니 마음이 당기지 않는다.

하늘의 별은 아름답다. 별이 아름다운 건 어둠의 두려움과 삭막함을 거둬들이는 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은 우리에게 희망과 꿈을 상징한다. 그 별을 손에 쥘 수는 없어도 그 별을 보고 어둠에서 제 길의 방향을 잡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별을 품고 산다. 그러나 그 별을 놓치면서 삶은 맵고 거칠어지며 갈 길은 아리송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건조하게 타성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의 별도 아니고 미리내(은하수)가 내 발 끝에 깔려있음을 읍성 뒤뜰에서 깨닫는다. 그저 높은 자리, 두툼한 지갑, 허울뿐인 명예를 탐하며 거칠게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뜨끔해진다. 소소한 것들이 주는 행복과 아름다움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는 반성을 그 은하수는 넉넉하게 품어준다. 어쩌다 우리는 그런 꿈과 아름다움을 놓치고 살고 있을까?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오래 볼 생각도 없으니 예쁘지도 사랑스럽지도 않다. 평생을 아이들과 살아온 시인은 아이들을 그 은하수로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시의 마지막을 읽기 전에 잠시 한 템포 멈춰야 한다. 그리고 조용하게 "너도 그렇다"라고 보듬었을 때 그 진가를 누릴 수 있다. 그 '너'가 어찌 풀꽃과 아이들뿐이랴? 바로 내가 그 '너'가 된다.

꿈은 잃은 것이 아니라 잊은 것이다. 은하수를 잃은 것이 아니라 잊은 것처럼. 은하수를 더 이상 하늘에서 찾아내는 것은 어려워도, 겸손한 마음으로 들판을 거닐며 눈길을 아래로 던지면 도처에서 은하수를 만날 수 있다. 잃어버린 나, 잊었던 꿈을 만날 수 있다. 너무 거창한 것들만 좇다가 그것을 얻지 못해 안달하고 좌절하며 절망하는 삶을 거둬야 한다. 메마르고 거칠며 무례하게 사는 삶을 멈춰야 한다. 그 은하수를 만나면 절로 무릎을 굽힌다. 그러나 무릎을 꿇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잊었던 꿈의 재회에 대한 기쁨의 경의이다.

쉰 중턱 넘은 사내들이 아이들처럼 좋아라 하며 화사해진 것은 바로 그런 잊었던 꿈과 아름다움에 대한 재발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친구들이 그 감동 잘 간수하고 산다면 삶은 조금 더 웅숭깊어질 것이다. 나의 은하수들이 하루를 마감하며 꽃잎을 오므리기 전에 다시 한 번 눈맞춤하러 읍성 산책이나 가야겠다. 하루의 평화에 감사하며.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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