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스테판 에셀 지음·목수정 옮김·문학동네 발행·300쪽·1만4,500원■ 세기와 춤추다·스테판 에셀 지음·임희근 김희진 옮김·돌베개 발행·436쪽·2만원■ 포기하지 마라·스테판 에셀 지음·조민현 옮김, 조효제 해설·문학세계사 발행·126쪽·9,500원
전 세계적으로 수백만 권이 팔린 베스트셀러 로 분노 신드롬을 일으킨 스테판 에셀의 회고록과 자서전, 마지막 인터뷰를 엮은 책이 잇따라 발간됐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로, 프랑스 외교관으로, 세계인권선언문 초안 작성에 참여한 주인공으로 활동한 에셀은 올해 2월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2010년 쓴 30페이지의 소책자 에서 젊은 세대들에게 정치적 무관심을 비판하고 분노하고 저항할 것을 촉구한 그의 외침은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 (인디그나도스)'과 미국의 '월가 점령 운동', 중동의 '아랍의 봄'에 영향을 끼쳤다. 한낱 은퇴한 외교관이던 그는 백전노장의 강력한 호소력으로 다시금 젊은이들에게 레지스탕스 정신을 일깨우며 일약 '행동하는 지성'으로 떠올랐다.
는 지난해 발표된 자서전이다. 죽음을 예견한 듯 겸허한 에셀의 태도와 레지스탕스 이미지에 가려져 있던 유쾌하고 인간적인 매력이 물씬 드러난다. 역자 목수정씨는 에셀이 체 게바라도, 칼 마르크스도, 부르디외도 아닌 행복에 대한 취향과 정의에 대한 각별한 신념을 가진, 콧구멍에서 늘 흥이 넘쳐나는 은퇴한 외교관이었을 뿐이지만 매혹적인 투사였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는 '아흔다섯의 나이에도 불의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참여를 청하면 기꺼이 응하는 단순한 활동가로서의 열정 못지 않게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게 인생의 중요한 명제임을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에셀 스스로도 '열정으로 충만했던 지난 80년간의 세월 동안, 온 마음과 정신을 쏟아 겪어낸 경험들이 담긴 통의 뚜껑을 막 덮으려던 참'에 일으킨 돌풍에 대해 놀라워했다. 를 통해 그가 세상의 주춧돌로 삼은 자유와 정의의 가치가 다시 되살아난 것에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던 것 같다.
'잔잔한 말년의 삶을 누리던 늙은 외교관이 세상의 기대와 마주한 그 시간은 별처럼 빛나는 순간들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유럽 전역을 휩쓸고 다녔다. 바르샤바, 뒤셀도르프, 마드리드, 토리노, 밀라노, 리스본….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거부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분노의 당위를 호소하는 격렬한 메시지의 전파자로서.'(28쪽)
그의 생애에 영향을 끼친 수많은 만남과 내밀한 고백이 등장하는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부모다. 에셀의 부모는 앙리 피에르 로셰의 소설 의 소재가 되기도 한 유명한 삼각관계의 주인공이었다. 어머니 헬렌 그룬트는 남편 프란츠 에셀의 절친한 친구인 로셰와 사랑에 빠져 아예 로셰가 살고 있는 파리로 이주했고, 프란츠 에셀은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3자간의 사랑에 동의했다. 에셀 역시 자유분방한 부모의 영향을 받아 그 사랑을 지지하고 어머니의 연인 또한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일 것이라고 받아들인다. 세인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가족사는 열일곱 때 서른넷이었던 친구의 어머니와 뜨거운 사랑을 하고, 20대에 한 미국인 남성과 동성애를 나누고,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사실을 모른 체 해주며, 30대에 만난 여성과 비밀스럽게 만나오다 아내가 죽은 후 재혼하는 등 질투가 없는 그저 충만한 사랑을 하도록 이끈다.
나치의 횡포에 맞서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유대인 수용소에 갇혀 처형될 뻔하거나 유엔 외교관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부딪친 숱한 좌절과 한계에도 체념하지 않는 낙관주의자였던 에셀의 면모가 책 곳곳에 묻어난다. 역사는 진보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진 지식인이 희망을 전파하기 위해 남긴 메시지가 강렬하게 다가온다.
는 에셀이 만 80세에 집필한 회고록으로 세계대전과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 분쟁과 인종 갈등, 냉전 등 세계사를 앞에서 겪으며 살아낸 퇴역 외교관이 전하는 한편의 역사 다큐멘터리처럼 읽힌다.
1917년 10월 독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에셀은 부모를 따라 일곱 살에 프랑스로 이주해 스무 살에 귀화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했고, 이후 1941년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샤를 드골 장군이 이끈 망명정부에 합류해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1946년부터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에셀은 드골, 미테랑 등 당대 최고 권력자들 밑에서 국제사회와 관련한 업무를 수행했는데 그 실패담도 포장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여유를 보인다.
에셀은 유엔 대사로 재직하며 자신이 새로운 균형의 전달자로 남는 게 가장 실존적인 선택이었음을 깨닫고 '성공한 중재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올해 3월 파리 앵발리드(군사기념관) 뜰에서 엄수된 장례식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그는 국?없는 시민, 체제 없는 유럽인, 당파 없는 투사, 한계 없는 낙관주의자였다'고 추모했다.
는 지난해 12월 말부터 에셀이 눈을 감기 직전까지 스페인 유력 일간지 '라 방구아르디아' 파리 특파원이자 작가인 유이스 우리아와 나눈 대화를 정리한 것으로 에셀의 유언 같은 책이다. 그는 "분노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만약 누군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거리에서 시위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분노가 진정한 참여로 변모되는 것이 필요하다. 변화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이후 에셀의 말년과 특유의 위트를 보고 싶다면 를, 나치 치하에서 보낸 청년기와 20세기 유럽 외교사에서의 자세한 활약상이 궁금하다면 를 추천한다. 는 유언 같은 짧은 인터뷰에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의 에셀론과 세계인권선언이 첨부돼 있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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