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굵기가 0.05mm 이하인 실핏줄까지 손금 보듯 선명하게 보며 뇌졸중이나 알츠하이머병을 진단할 수 있는, 세상에 없던 최첨단 뇌 영상 기기를 만들겠다."
2011년 한 유명 과학자와 대학병원 연구진이 기자회견을 통해 한 약속이다. "뇌질환 정복은 물론 뇌영상기기 100% 수입국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이 연구를 미래 유망 분야 핵심 원천기술로 정하고 지난해부터 5년간 총 1,094억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지금 이 연구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연구진이 만들겠다는 기기는 14T(테슬라ㆍ자기장의 크기를 나타내는 단위) 뇌영상자기공명(MRI) 장비였다. MRI는 강력한 자기장을 발생시켜 인체 구성 물질의 자기적 특성을 측정해 컴퓨터로 영상화한다. 현재 병원에서 뇌 영상을 찍는 MRI가 보통 3T 짜리니 14T는 이보다 자기장이 5배 가까이 강하다. 연구진은 알츠하이머병의 원인 단백질이나 미세한 실핏줄, 복잡한 뇌신경 연결망 등 3T MRI로는 어림 없는 영상을 14T로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원이 결정된 뒤 지난해 교육과학기술부는 개발을 진행할 연구진을 모집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아무도 안 나섰다. 개발을 제안한 과학자조차 지원하지 않았다. 이 과학자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당시 다른 연구자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해 예산 중 일부(약 400억원)를 (내가 소속된)대학이 부담하라고 정부가 입장을 바꿨다"며 "우리 대학이 그만큼 투자할 여력이 없어 지원하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교과부로부터 14T MRI 개발 사업을 넘겨 받은 미래창조과학부 관계자는 "제안한 당사자조차 지원하지 않았으니 개발 가능성과 필요성을 다시 검토할 예정"이라며 "지난해 예산으로 책정됐던 30억원은 현재 국고로 환수됐다"고 밝혔다. 뇌과학 분야 세계 최고 수준에 진입하겠다며 요란하게 홍보했던 14T MRI 개발이 원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과학계와 의료계 내부에선 상용화 가능성이 불투명한 14T MRI에 대규모 예산을 투입하는 게 합당하냐는 목소리마저 나온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4T 이상의 MRI를 인체에 적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다. 너무 강한 자기장을 받으면 인체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알 수 없어서다. 한 의공학자는 "10T 이상의 연구용 MRI가 외국에서 더러 개발됐지만, 활발하게 쓰이진 않는다"며 "더군다나 의료용이라면 실용성을 기대하기 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지원의 타당성이 애초에 제대로 검증됐는지부터 의문이 생기는 대목이다.
미래 핵심기술이라던 14T MRI 개발사업이 1년여 만에 연구진과 정부가 서로에게 책임을 미루는 골칫덩이로 전락했다. 장밋빛 희망을 내놓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스스로 제시한 희망을 현실화하는 것은 더 무거운 책임이다. 새 정부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린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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