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왕따'인 고교 3학년 남학생을 같은 반 친구 A군이 "바보 같은 놈"이라고 욕하며 발로 찼다. 자신도 따돌림을 당하지 않기 위해 저지른 행동이지만 이 장면을 B군이 휴대폰 카메라로 찍었다. 운동장에서 혼자 울던 왕따 학생을 본 B군은 '학교 폭력이 없어져야 한다'는 글과 함께 동영상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렸다.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인터넷을 통해 퍼진 동영상으로 A군에게는 비난이 쏟아져 우울증 치료를 받기에 이르렀다. 결국 A군은 B군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B군의 동영상 게시는 무죄일까, 유죄일까.
24일 오후 이 사건 공판이 열린 서울동부지법 15호 법정 풍경은 예사롭지 않았다. 법복을 입고 판사석에 엄숙하게 앉은 재판장이나 배심원, 검사, 변호인 등은 하나 같이 앳된 여고생이었다. 증인으로 출석한 학교 직원도 마찬가지다.
이날 명예훼손 재판은 가상 사건을 다룬 모의 국민참여재판이다. 서울동부지법이 4월 25일 법의 날을 맞아 학생들에게 가장 민감한 학교폭력 문제를 학생 스스로 풀어보도록 마련했다. 대원여고 시사반 2학년 학생들이 재판장 등 각자 재판의 주체로 분했다.
심문과 변론은 한치 양보 없이 치열했다. 검사를 맡은 정다혜(17)양은 "피고인은 고소인에게 심각한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입혔기 때문에 징역 1년에 처해 주기 바란다"고 재판장에게 요청했다. 이에 변호인 신다슬(17)양은 "피고인은 사회적 불치병인 학교폭력을 해결하기 위해 접속이 제한적인 학교 홈페이지에만 동영상을 올렸고 직접 인터넷에 유포한 게 아니라 무죄"라고 맞섰다. 피고인 역의 김유현(17)양도 "동영상 공개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행위"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배심원 12명 중 3명만 유죄, 나머지 9명은 무죄 평결을 내렸다. 배심원 의견을 들은 재판장 왕윤정(17)양은 하지만 "피고인의 취지는 정당하지만 고소인이 입은 피해와 명예훼손이 심각하다"며 벌금 1,000만원을 선고했다.
이날 모의 재판에서 피고인과 증인이 역할을 혼동해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지만 재판장과 배석판사들이 귓속말을 하는 모습까지 그럴듯하게 재현하는 등 실제 재판을 방불케 했다. 배심원을 맡은 김지영(17)양은 "왕따와 학교폭력 문제는 워낙 예민해 선생님들 선에서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며 "학교 문제 해결에 상당히 도움이 될만한 모의재판이었다"고 말했다. 서울동부지법은 내달 말까지 8차례 청소년 모의재판을 진행할 계획이다.
김관진기자 spiri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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