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나라가 '창조경제' 때문에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 있다. '창조경제'가 이제 '창조외교'나 '창조관광'으로까지 번졌다니, 아무튼 우리 사회의 유행타기 능력은 알아줘야 할 것 같다. 이렇듯 뭔가 뜬다 싶으면 모든걸 다 던져서 머리를 싸매고 그 흐름에 올라타 무언가 만들어내려고 궁리하는 모습은 어쩌면 지난 60여년을 지탱해온 압축성장의 비결인지도 모른다. 어느 경영학자는 이런 한국인의 기질을 '신바람'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가난 탈피'라는 명제를 위해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를 부르며 새마을 운동에 몰입하는가 싶더니, 그들의 조카뻘쯤 되는 세대가 '독재 타도'를 위해 넥타이를 풀어헤치고 거리로 달려 나왔던 게 우리네 역사다. '세계화' 바람에 글로벌 마인드를 부르짖었던 것도, 2000년대 초반에는 벤처열풍에 백만장자의 꿈을 꾸었던 것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작금의 '창조경제' 열풍을 단지 새 대통령의 등장에만 귀인 시키는 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이 흐름은 혁신의 구호라기 보다는 차라리 절규에 가깝다. 금 모으기도, 스펙을 쌓기 위한 온갖 노력도 더 이상 일자리나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기에 뭔가 아예 새로운걸 만들어내기 전에는 답이 없을 것 같은 절박함. 기업은 기업대로 새로운 무언가가 없이는 중국이나 일본과 겨루기엔 힘이 부칠 것 같은 한계를 느끼고 있고, 개인은 각자 '직장의 신'이 되지 않고서는 자리를 보전하기 어려운 현실에 오한을 느끼고 있다. 바로 그 절박함이 우리 모두를 '창조경제'라는 신곡에 춤추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얻은 벼락 인기와 '창조경제'라는 풍악도 이런 일관된 흐름 속의 한가지 표식일 뿐이다.
학자들은 흔히 이렇게 얘기한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이 있겠느냐고. 사실 창조라는 것도 그렇다. 기존에 쌓여있는 지식이 얽히고설켜 뭔가 새로운 활용방안을 찾아내는 것이 창조일 수도 있다. 사회학자 김용학의 를 보면 창조를 가능케 하는 창의성은 기존의 사물이나 아이디어를 다만 뒤집어보고 자유롭게 엮어보는 데서 시작한다. 특별히 창조에 탤런트를 가진 사람이 있다기 보다는 이런 자유로운 생각의 흐름을 여유롭게 즐길 줄 아는 데서 창조가 시작되는 것이다.
얼마 전 '레 미제라블'의 열풍이 한국을 강타했을 때, 공군의 몇몇 장병들은 군인의 애환을 담은 '레 밀리터리블'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불과 한달 만에 100만원 남짓한 예산으로 만든 그 패러디 비디오에서 코제트 역을 맡은 사람은 여군 장교였고, 상대역은 의무복무중인 병사였다. 감독 역할을 한 사람들은 단기복무하는 장교들이었다. 그들은 100만원 남짓한 예산으로 유튜브에서 수백만 회의 조회수를 기록했고, 수많은 방송 출연 등으로 공군의 이미지를 알리는데 수백억원 가치의 공헌을 했다.
그렇다면, '레 밀리터리블'을 가능케 한 것은 무엇일까? 비디오의 첫 장면은 비행장에서 눈을 치우며 온갖 불평을 하는 병사들로부터 시작한다. 군복무를 했던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함께 그리움을 자극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만약 어느 경직된 마음을 가진 상관이 첫 장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그 부분을 삭제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리 극중이라지만 어떻게 여군 중위와 일개 병사가 로맨스를 가질 수 있느냐며 이를 군기문란이라고 추궁했다면 과연 '레 밀리터리블'이 가능했을까? 요는 자율과 창의를 존중하는 공군의 조직문화 속에서 계급을 초월하는 자유분방한 엮임과 협력이 '레 밀리터리블'의 신화를 가능케 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창조경제 대소동의 성패는 돈보다 '여건'이 될 것이다. '레 밀리터리블'에서 볼 수 있듯이 나이, 사회적 지위, 학벌, 성별이 훌륭한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을 제약하거나 착취할 수 없도록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교환되고 경쟁할 수 있도록 돕는 여건만 만들어진다면 창조는 자연스레 이뤄진다. 또 다른 '레 밀리터리블'이 나올 수 있도록 모두가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볼 필요가 있다.
김장현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융복합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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