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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에서 자란 소설가로서 그 사건을 안 쓴다는 것은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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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에서 자란 소설가로서 그 사건을 안 쓴다는 것은 수치"

입력
2013.04.2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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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현수(54)씨의 고향은 충북 영동군 황간면이다. 충청, 전라, 경상 삼도가 한데 만나는 곳이자 각각의 땅으로 분기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의 고향집에서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히 내놓으면 쌍굴이 하나 보인다고. 어린 시절 매일같이 드나들었고, 거기 고인 물웅덩이에서 이런저런 물고기들과 장난을 하며 시간을 보내던 곳이다. 그곳이 '노근리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 쌍굴이라는 건 AP통신의 특종보도가 있었던 1999년에야 알게 됐다.

"뒤통수를 얻어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죠. 마을 어른들 중 누구도 입에 올린 적 없는 전혀 몰랐던 사건이었으니까요." '한국판 홀로코스트'라 할 사건도 자체도 충격이었지만, 쌍굴 코앞에 살면서도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게 더 충격적일 정도였다. 생각해보면 마을에 얼굴이 훼손된 어른들이 많았던 게 이상했던 것도 같았다.

마을 사람 모두를 거대한 비밀의 공모자로 만들었던 그 가공할 사건은 작가의 뇌리를 오래도록 손아귀에 쥐고 있었지만, 군대도 못 간 여성작가로서 감히 덤빌 생각은 하지 못했다. "누군가 남성작가가 써줬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누구도 쓰지 않더군요. 제가 쓰겠다고 했을 때도 말리기만 하고…. 힘은 있는 대로 들고, 읽는 사람도 없을 거라는 거죠. 저도 물론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곳에서 나고 자란 작가로서 이 사건을 쓰지 않는다는 게 부끄러웠어요."

오로지 수치심에서 시작한 소설쓰기는 무려 5년이 걸렸다. 무엇보다도 취재가 어렵고 품이 들었다. 소설은 노근리사건이 벌어진 1950년 7월26일부터 29일까지 나흘간의 비밀을 조선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00여년의 역사와 촘촘히 엮으며 추적해간다. 그래서 제목이 (문학동네 발행)이다. 세련되고 감각적이기보단 성실하고 꼼꼼하게 씌어진 소설이다.

작가는 소설이 단순한 기록문학이 되지 않도록 가장 신경을 썼다. 작가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그곳에서 살아간 30대 다큐멘터리 제작 PD 김진경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5대에 걸친 조선조 내시가의 삶과 사랑을 역사와 교직한다. 내시가 양자를 들이고, 그 양자가 다시 내시가 되며 구축한 가문의 부와 위세는 내시의 자손이라는 비웃음과 상처를 대가로 얻은 것.

"처음엔 진경을 동학 대접주 조재벽 가문의 손녀로 설정했는데, 역사의 무게로 휘청거리느라 써지지가 않더군요. 20년쯤 소설 쓰기를 하다 보면 하나쯤 전공 분야가 생기는데, 저는 기생이나 내시, 이쪽인 것 같아요. 내시가로 설정을 바꾸고 나니 이야기가 술술 풀리고 윤기가 돌더라고요."

작가는 소설을 쓰는 동안 "노근리 사람들을 가장 먼저 버린 게 이 나라의 정부였다는 사실이 가장 가슴 아팠다"고 한다. "노근리는 국가가 임시수도가 있던 대구를 수호하기 위해 처참하게 버려진 곳이었어요. 과연 노근리사건의 책임이 미군에게만 있었던 걸까요."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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