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엔화 약세로 현대자동차 등 일부 수출 제조업체가 타격을 받고 있지만, 국내 경제 전반에 미치는 엔저의 부정적 영향은 실제보다 과장됐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금의 엔저 흐름이 과거 엔화 강세에 대한 정상화 측면도 있는 만큼, 단기적인 정책 대응에 연연하기보다 근본적인 경쟁력 강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조언이다.
23일 일본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98.65엔을 기록했다. 엔저 현상이 본격화한 지난해 11월 초에 비하면 달러당 20엔이나 상승한 것이다. 반면 이날 원·엔 환율은 2008년 7월 이후 최저 수준인 1,137.08원으로 마감했다. 최근 6개월 간 하락률은 20%에 달한다.
세계시장에서 일본 제품과 경쟁해야 하는 국내 수출 기업에겐 악재가 아닐 수 없다. 한국 수출 기업들의 1분기 영업이익이 부진할 것으로 예상되는 이유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원·엔 환율 추세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실제 엔화 가치의 부침에도 우리나라의 수출과 무역흑자 규모는 꾸준히 유지돼 왔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원ㆍ엔 환율은 900~1,100원에서 등락했다. 이후 엔저 현상으로 2007년 700원대까지 떨어졌지만 이듬해 다시 900원대를 회복했다. 그러다 2008년 8월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이른바 '슈퍼 엔고' 현상이 나타난다. 엔화가 불과 7개월 새 700원 이상 급등하며 1,600원대까지 치솟은 것이다. 2009년 하반기 단기 급등세가 진정되면서 1,200~1,500원을 오갔다. 엔고 기조가 지속된 것은 최근 3년 정도에 불과한 셈이다.
한국 기업들은 '슈퍼 엔고'의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렸다. 삼성전자 등 IT기업들의 주력 수출품인 LCD TV는 강력한 경쟁상대였던 일본 제품보다 20~30% 저렴한 가격 수준을 유지했고, 현대차는 2010년 5월 독일시장 점유율에서 사상 처음 도요타를 제치는 등 호시절을 구가했다. 박성욱 한국금융연구원 거시ㆍ국제금융연구실장은 "금융위기 이후 엔화가 지나치게 고평가 되고, 원화는 저평가된 측면이 있었다"며 "우리 기업들이 너무 좋은 환율 환경에서 경쟁했던 것"이라고 판단했다.
어찌 보면 엔고의 호시절이 비정상이라 할 만큼 오랜 기간 엔저 환경에서 일본 제품과 경쟁해왔고, 그러면서도 무역흑자를 꾸준히 기록하는 등 엔저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부정적이지만은 않았다는 뜻이다. 윤성욱 기획재정부 산업경제과장은 "지금보다 엔저 현상이 더 심했던 2000년대 중반에도 우리나라 성장률과 수출은 양호한 수준을 유지했다"며 "엔화 약세의 영향이 본격적으로 나타날 올해 하반기에는 세계경제가 회복 국면에 들어설 가능성이 높은 만큼 엔저의 부정적 영향이 제한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부가 일본처럼 양적완화 정책을 통해 국내 기업 보호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도 현실과 는 맞지 않는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우리는 기축통화국이 아닌 데다 물가인상과 외국인 투자이탈 위험 탓에 일본과 같은 통화정책을 펼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곽병열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정부가 나서서 환율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긴 쉽지 않다"며 "우리처럼 개방도가 높은 나라에선 더욱 그렇다"고 강조했다.
결국 기업들이 환율 변동에 일희일비 하지 않고 제품 경쟁력 강화에 매진하는 자세가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앞으로 2~3년 간 엔저 현상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과거 일본 기업들이 엔고 시절 '마른 수건을 짜듯' 비(非)가격경쟁력 확보에 노력했던 것처럼 우리 기업들도 엔저 시대에 맞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성욱 실장은 "속도가 늦춰질 수는 있어도 장기적인 엔저 추세는 분명해 보인다"면서 "엔고가 지속됐던 과거 몇 년간 일본 기업들이 했던 것처럼 국내 기업들도 제품 경쟁력 향상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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