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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인간의 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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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인간의 등급

입력
2013.04.2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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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마다 기원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동네 어귀 건물에는 으레 이발소와 복덕방, 당구장 등과 함께 바둑 두는 기원이 있어 중년 남자들의 아지트 역할을 하곤 했었다. 유리창을 통해 때론 무심하게 때론 심각한 표정으로 반상에 집중한 어른들의 모습이 보였는데, 대개 바둑알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날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어떤 날에는 여러 어른들이 한 구석에 모여 웅성거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큰 판이 열렸다'는 느낌이 왔다. 바둑돌 하나가 바둑판 위에 놓일 때마다 반사적으로 터져 나오는 어른들의 한 숨과 잔뜩 힘이 들어간 손동작은 그 대국의 중요성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판이 커지면 거의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아저씨가 이긴 것으로 기억한다. 서부영화에 비유하자면 우리 동네 실력자들이 떠돌이 총잡이에게 줄곧 물먹은 격인데, 그 승부는 언제나 간발의 차였던 것으로 전해 들었다.

나중에야 떠돌이 총잡이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내기바둑의 고수들 쉽게 말해'꾼'들이었다. 그들은 기원을 떠돌며 내기바둑을 두어 생계를 유지하던 재야의 고수들이었다. 실력 차이가 뚜렷하면 내기바둑을 두지 않았기에 이들은 철저히 자신을 위장하며 상대를 물색했다. 그러다 먹잇감을 포착하면 갖은 방법을 써서 상대방을 내기바둑으로 유인했다. 상대를 게임의 장으로 끌어오기 위하여 자신의 실력을 감추고 현혹시켰던 것인데, 이들은 결코 크게 이기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승부를 내어 상대방이 '한 번 더'를 외치게 하고 결국 판돈이 크게 걸린 막판에 고도의 집중력으로 승부를 내곤 했던 것이다. 이들 내기바둑의 강자인 재야의 고수들이 상대방의 실력을 알아내는 비결이 궁금했다. 그런데 이들 떠돌이 총잡이들이 상대방의 실력을 알아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바둑의 고수들은 상대방이 바둑알 집에서 바둑돌을 꺼내 바둑판 위에 놓는 손놀림만으로도 실력을 읽을 수 있음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내기바둑의 꾼들은 상대방이 3급 정도면 3급에 맞춘 손놀림을 하였고 1급 정도면 1급에 맞춘 손놀림을 하여 상대방을 현혹시켰다. 바둑에 조예가 없는 나로서는 급에 맞는 손놀림이 있고 또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는 단순한 동작에 자신의 실력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나보니 내기바둑의 고수들만이 병아리감별사와 같은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뮤지컬 등의 오디션 경쟁률이 수십 대 일을 넘은 지 오래인데 아무리 오디션 지원자가 많아도 실력 있는 이를 선정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는 음악감독을 하던 지인의 말을 들었다. 지원자가 부르는 노래를 다 들을 필요가 없고 앞부분의 짧은 소절만 들어도 오디션 참가자의 실력은 금방 알 수 있다는 말을 듣고선 전문가는 다르구나 하는 감탄을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종종 했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결석한 학생들의 눈빛과 동작, 변명의 목소리를 찬찬히 들으면 그 진실성을 정확히 맞출 수 있었다. 그뿐 아니다. 명색이 전공자인 내 앞에서 나의 전공분야에 대하여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가르치려 드는 이들의 정제되지 않은 말들 속에 드러나는 허점은 목소리가 아무리 크고 분명해도 쉽게 들렸다. 한 두 마디 말 속에 드러나는 용어사용법만 보아도 그 사람의 지식의 깊이와 이해의 폭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사람의 바닥은 이렇게 쉽게 드러나는 것이라 아무리 노력해도 감출 수 없나 보다.

그러나 한편으론 두렵다. 잠시 접한 사람의 인상이나 행동을 보고 내린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척척 맞을 때면 내 짐작이 옳았어! 라며 기뻐해야 할 지 아니면 이런 것이야말로 그릇된 선입견 또는 극복해야 할 편견이 아닌지 등등의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는 자는 남에게 어떤 모습 또는 어느 등급 정도로 보일까 두려워질 때가 있다. 이런 것을 인지상정이라 하는 것일까.

김상엽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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