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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공정위의 칼, 대어만을 겨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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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공정위의 칼, 대어만을 겨눈다면

입력
2013.04.21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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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경제민주화의 전위부대로 잔뜩 힘이 실리는 공정거래위원회이지만, 심각한 존립 위기를 맞았던 때가 있다. 그리 오래 전도 아니다. 5년 전 이명박정부가 출범할 무렵의 얘기다.

당시 집권세력은 대선이 끝나고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꾸리면서 공정위를 배제했다. 다른 부처들은 다 소속 공무원들을 인수위로 파견했지만, 차관급 청(廳)단위 기구도 아니고 명색이 힘 센 장관급 부처인 공정위만 유독 초대받지 못한 것이었다. 인수위에 올 필요가 없다는 건, 공정위와 더 이상 할 얘기도 들을 얘기도 없다는 뜻이었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쳤던 이명박정부의 초기 행보는 대단히 친대기업적이었다. 규제란 규제는 다 없앨 태세였고, 그 중에서도 재벌 규제의 아이콘과도 같았던 출자총액제한제는 폐지 리스트의 맨 위에 놓여 있었다. 사실 당시 출총제는 숱한 손질로 이미 누더기가 되어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지만, 공정위는 마치 부처의 존재 이유인양 지나칠 정도로 이 제도에 집착하고 있던 터. 이명박정부의 눈엔 그런 공정위가 출총제와 함께 사라지거나, 최소한 힘이라도 확 빼야 할 조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이자 실세였던 백용호씨가 수장으로 오면서 공정위는 조직 축소나 격하 위기에선 벗어났지만, 한동안 '정체성'혼란을 겪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공정거래법 탄생 자체가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한 것이었고, 공정위 역시 수십 년간 재벌들을 벌주는 데 주력해왔는데, 갑자기 재벌에서 손을 떼라고 하니 그 당혹감과 허탈감이란….

재벌을 풀어주게 된 공정위의 새 타깃은 카르텔(담합)이었다. 거대 정유회사부터 가전업체, 소주회사, 심지어 단무지 회사까지 가격 담합은 이명박정부 5년 동안 공정위가 가장 많이 조사했고, 또 가장 강하게 제재한 분야였다. 물론 물가가 뛰자 가격을 끌어내리기 위해 '공정위는 물가 당국'운운하며 칼을 막무가내로 휘두른 적도 있었지만, 어쨌든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시장 곳곳에 만연해있고, 법을 어겨도 최소한의 죄의식조차 없었던 기업들의 담합 행위를 찾아내 단죄한 건 우리나라 경쟁정책 사상 커다란 진전임에 틀림없다.

이제 공정위는 또 한번의 정체성 변신을 앞두고 있다. 경제민주화 입법을 통해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감시와 제재가 강화되면서, 공정위는 다시 재벌 규제 기구로 회귀하게 됐다. 재벌조사 전담국 설치까지 추진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냥 5년 전으로의 복귀가 아닌 그 때보다 훨씬 강한 파워부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감 몰아주기는 분명 '나쁜 내부거래'다. '착한 수직계열화'와 경계가 모호한 지점도 있지만, 경쟁을 제한하는 모든 거래 폐습을 없애는 게 공정위의 책무인 이상 경쟁 자체를 거부하는 일감 몰아주기를 엄단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5년 만에 다시 재벌을 메인 타깃으로 삼게 된 공정위는 아마도 모든 힘을 여기에 쏟아 부으려 할 것이다. 그 결과 규모는 소소하더라도 시장에 미치는 독성으로 따진다면, 재벌 폐해 못지 않게 치명적인 독점과 담합에 대한 감시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기야 삼성 현대차 SK 같은 거대 그룹과 그 총수 일가를 겨눌 칼을 쥐게 됐는데, 밑반찬이나 만드는 영세 중소기업의 담합이 눈에 들어나 올까. 피라미보다는 대어를 잡고 싶은 게 관료의 속성이고, 권력기관일수록 그런 욕구는 강렬하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도 문제지만 공정위의 재벌 집중도 문제다. 독점과 담합은 시장경제엔 정말로 나쁜 해악인데, 재벌에 몰두하느라 카르텔을 놓친다면 국민들이 누릴 후생은 더 후퇴하게 된다. 1990년대 이후 재벌 규제 기구로 군림했던 지난 오랜 세월을 돌이켜보면, 이것이 그저 기우만은 아니라는 걸 공정위 스스로 잘 알 것이다.

공정위는 힘을 잘 배분해야 한다. 잘못하면 독배가 된다. 공정위에 독배면 우리 경제에도 독배다.

이성철 산업부장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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