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정의 사람, 이야기] 세계 1억인 서명 운동 나선 정대협 윤미향 대표
한국일보가 서울 종로구 중학동에 터 잡고 있던 시절, 인접한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리는 날이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일본 정부는 강제연행 사실을 인정하라!” “공식 사죄하고 배상하라!” 혹한이 닥쳐도, 장대비가 쏟아져도, 매주 수요일 낮 12시면 어김없이 모여 한 맺힌 절규를 쏟아내던 할머니들의 눈을 차마 바로 볼 수 없어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음을 재촉하곤 했다.
침울하던 수요시위 분위기가 언제부턴가 달라졌다. 구호를 외치는 목소리가 한층 젊어졌고, 네모 반듯한 피켓 대신 노랑, 보라색 나비 모양 손 팻말이 등장했다. 격식을 깬 자유발언에 흥겨운 노래와 춤도 곁들여졌다. 2011년 12월 1,000차 시위 때 세운 ‘소녀상’(평화비)은 겨울이면 털모자와 목도리를 두르고 비가 오면 우비를 입는 등 극진한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이 도도한 연대의 물결을 국제사회로 확산해 세계인의 요구로 일본을 압박하기 위해 최근 ‘1억인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지난 17일 마포구 성산동 주택가에 자리한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을 찾았을 때, 담벼락에 나붙은 노랑 종이 나비들이 눈길을 붙들었다. 박물관을 찾은 이들이 마음을 담은 글을 적어 달아 놓은 것이다 박물관 관장을 겸하고 있는 윤미향(49) 정대협 상임대표가 건넨 명함에도 보라색 나비 한 마리가 찍혀 있었다.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킨다고 하잖아요. 세계 곳곳을 부지런히 날아 다니며 국제 여론을 움직여 내년 8ㆍ15 광복절 때까지 ‘위안부’ 문제 해결에 확실한 성과를 낼 작정입니다.”
-노랑과 보라, 나비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나요?
고귀함의 상징인 보라는 할머니들의 색깔이에요. 그 끔찍한 고통 속에서도 고귀함을 잃지 않고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알리고 있잖아요. 노랑은 우리의 몫인 희망과 연대를 의미해요. 연대를 통해 할머니들의 고귀한 뜻을 더 빛나게 하자는 거죠. 나비를 정대협 활동의 상징물로 삼은 것은 ‘위안부’ 문제 해결뿐 아니라 세계 모든 여성들이 차별과 억압, 폭력으로부터 해방돼 자유롭게 날갯짓하는 세상을 염원한다는 뜻이에요.
-상징색과 상징물을 만든 계기는 뭔가요?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기이치 당시 일본 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수요시위를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어요. 90년대 시위 분위기는 한마디로 잿빛이었어요. 젊은 친구들이 멋 모르고 싱글싱글 웃다가 눈총을 받았죠. 해방 50년이 지나도록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 대한 부끄러움과 분노, 고통이 컸던 거죠. 2000년 도쿄에서 아시아 여성단체들 주도로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 국제법정’이 열렸어요. 비록 민간법정이지만 히로히토 일왕 등 10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는데 일본은 오히려 역사교과서에서 위안부 관련 내용을 삭제하고 망언을 쏟아냈어요. 그때부터 생각을 바꿨어요. 일본이 위기의식을 느껴 저러는 거다, 시간이 걸릴 뿐 우리가 이긴 싸움이다, 우리 스스로 절망의 고통에 갇힐 필요가 없다, 밝고 힘차게 싸우자고. 2004년 3월 600차 시위 때부터 세계 각국의 연대시위를 조직하면서 이 투쟁을 이어갈 청년과 아이들까지 어울려 축제처럼 즐길 수 있는 분위기로 바꿔 나갔어요.
-그래서 성과가 있었나요?
물론이죠. 우선 젊은 세대의 참여가 크게 늘었어요. 운동의 철학이 갖춰지니 외국 분들도 뿌리부터 차근차근 쌓아온 운동이구나 하고 관심을 갖게 됐죠. 요즘은 시위 때마다 100~150명씩 참여하는데, 자유발언 하려고 줄을 서요. “할머니들께 힘 보태러 왔다가 제가 힘을 얻어 가요” 그런 말들을 많이 해요. 22년째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이어온 것도 그렇고, 할머니들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모두가 주인으로 참여하는 이런 시위는 아마 유례가 없을 거예요. 올 1월 수원의 한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이 제게 편지를 주고 갔는데, 펼쳐 보니 ‘꽃’이란 자작시가 적혀 있더라고요. ‘눈 앞이 캄캄하지만/ 용기도 일어나고// 온 몸에 힘이 빠져도/ 노력을 했고// 많은 것을 포기했기에/ 당당하게 하늘을 쳐다볼 수 있는// 우리는 그런 당신을/ 꽃이라 부릅니다.’ 정말 멋지지 않아요? 돌아오는 승합차 안에서 할머니들께 읽어드렸는데 완전 감동의 물결이었죠.(웃음)
2012년 할머니들과 정대협에는 뜻 깊은 일이 많았다. 오랜 숙원이었던 ‘전쟁과 여성인권 박물관’이 5월 5일 문을 열었다. 박물관은 원래 서대문 독립공원 안에 지을 계획이었으나 광복회 등의 반대로 무산됐다. 성미산 자락에 자리한 박물관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주택을 개조해 공간은 협소하지만, 알찬 설계 덕에 역사 교육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이날도 예일여고 여성문제 동아리 등 학생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시멘트를 걷어내 벽돌이 그대로 드러난 계단 벽에는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을 군데군데 새겨 놓았는데, 2층 입구에 새겨진 글은 미래세대를 향한 당부였다. “우리 역사를 보고 배워서 다시는 전쟁 없는 세상, 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어 주세요.” 돌아가신 할머니의 사진을 벽돌마다 붙여놓은 2층 추모관에서 옛 추억을 더듬던 윤 대표는 “일본의 사죄를 받고 눈 감는 게 소원이셨는데…”라며 안타까워했다. 정부에 등록된 236명의 위안부 피해자 중 현재 생존자는 58명뿐이다. “작년 개관하고 나서 저 아래 정원에 나비 한 쌍이 날아와 한참을 놀다 갔는데, 저도 모르게 ‘아, 할머니들 왔다’ 그랬어요. 수요시위가 이만큼 호응을 얻게 된 것도 할머니들이 주축이 됐기 때문이에요. 더 늦기 전에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야죠.”
생존자들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아 수요시위에 꾸준히 참석하는 이는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 2명뿐이다. 이들은 지난해 3월 향후 일본 정부로부터 받게 될 배상금 전액을 전세계 분쟁 지역의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돕는 데 쓰겠다고 밝혔다. 이른바 ‘나비기금’이다. 가수 이효리의 500만원 기부로 첫 발을 떼 지금까지 5,758만원이 모금됐고, 첫 수혜자로 선정된 콩고민주공화국의 성폭력 피해자이자 활동가인 레베카 마시카씨에게 월 500달러를 지원하고 있다. 올해는 강간 피해자를 돕는 의료단체에 약품구입비로 월 500달러를 추가로 지원하고, 향후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성폭행 피해자들도 지원할 계획이다.
12월 대만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서는 고 김학순 할머니가 91년 8월 14일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해 문제 해결의 물꼬를 튼 것을 기려 8월 14일을 ‘세계 위안부의 날’로 정해 다양한 기념 행사를 열기로 했다.
-광복회 등은 왜 독립공원 내 박물관 건립을 반대하나요?
사무실에 들이닥쳐서는 “할아버지 문제도 해결 안됐는데 손녀들이 치고 들어와?”하며 호통을 치더군요. 공식적으로는 민족의 수치이자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며, 자학적인 교육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어요. 일본 우익의 주장과 똑 같은 논리죠. 그래서 우리의 싸움은 일제의 과거 만행을 청산하는 싸움이자 여전히 가부장제에 찌들어 있는 우리사회의 반(反)여성, 반 인권적 질서와의 싸움이기도 해요. 박물관 건립이 시급해 한 발 물러섰지만 포기하진 않았어요. 언젠가 독립공원 안으로 옮겨 갈 겁니다.
-할머니들이 분쟁 지역 피해 여성 지원에 나선 것이 놀랍습니다.
2007년 미국 하원에서 일본의 사죄 촉구 결의안을 채택한 것을 계기로 할머니들과 함께 세계 각국을 방문해 연대 활동을 펼쳤어요. 그때 우리의 투쟁이 궁극적으로 평화와 여성 인권을 위한 길임을 깨달은 거죠. 진정한 연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만나야 이뤄질 수 있어요. 기지촌 여성들과도 그랬어요. 할머니들이 처음엔 “우린 끌려갔지만 쟤들은 자원했으니 더러운 것 아니냐”며 선을 긋더니, 자꾸 만나서 얘기하면서 달라지더라고요. 길원옥 할머니가 한번은 이래요. “입 닫고 산다고 과거가 없어지는 게 아니야. 나도 예전엔 그랬어. 그런데 입을 여니까 아픈 과거가 없어지고 견딜 수 있는 역사가 만들어지더라고. 정부에 요구할 게 있으면 입을 열고 말을 해. 언니인 내가 도와줄게.” 다들 감동했죠. 정대협 운동의 힘이 참 대단하지 않아요?(웃음) 가장 낮은 자리에서 겹겹의 고통을 당했던 분들이기에 약자들을 품을 수 있는 거죠. 수요시위에는 고엽제 피해자도 오고, 장애인, 성적 소수자도 와요. 무슨 말을 해도 다 들어줘요. 그게 우리의 가장 큰 자랑이에요.
-최근 말뚝 테러, 소녀상 합성사진 유포 등 일본 우익들의 행패가 극에 달했는데.
개인들이 그럴 땐 까짓것 하고 넘겼는데, 지금은 일본 정부와 민간, 언론이 삼위일체가 돼 움직이고 있어 아주 심각해요. 전범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이 모든 문제의 뿌리예요. 미국이 결의안을 채택하고 하는 게 우리를 지원하는 게 아니에요. 그들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죠. 전쟁 끝난 뒤 조선의 위안부들이 미군의 포로로 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미국은 위안부의 실상을 다 알았는데도 그대로 덮어버려 전범들에게 면죄부를 줬어요. 아베 신조나 아소 다로 같은 A급 B급 전범의 후손이 총리, 부총리 자리에 올라 망언을 쏟아내는 사회에서 젊은 세대가 뭘 보고 배우겠어요? 일본 참의원을 찾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우리 할머니들에게 우익단체들이 몰려와 코 앞에서 “매춘부 꺼져라”라고 시위를 해요. 너무 끔찍해요. 일본사회 전체가 범죄를 재생산하는 시스템이 돼버렸는데 폐해가 더 커지기 전에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나서 진상을 밝히고 전쟁범죄를 제대로 해결하라고 요구해야 합니다. ‘세계 1억인 서명 운동’이 그래서 중요해요.
-1억이란 숫자는 무슨 의미인가요?
궁극적인 목표는 일본군 ‘위안부’의 진상을 10억 명이 알게 하는 겁니다. 그래야 10% 정도가 서명을 하지 않겠어요? 또 일본 인구가 1억 2,700만 명인데 그에 맞먹는 1억 명 정도의 힘을 모아야 우익들의 목소리를 누를 수 있겠죠. 나치의 유대인 학살은 세계인이 다 아는데, ‘위안부’ 문제는 너무 몰라요. 성노예는 어디나 있겠지만, 국가가 ‘위안’(慰安)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내세워 조직적으로 성 범죄를 저지른 나라는 전세계에서 일본밖에 없어요. 영어로는 성노예를 뜻하는 ‘Sex Slaves’로 쓰고 있지만, 우리가 굳이 ‘위안부’란 용어를 따옴표까지 붙여가며 고집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예요.
-1억 명 서명을 받는 게 말처럼 쉽지 않을 텐데, 구체적인 계획이 있나요?
오프라인에선 인권ㆍ평화ㆍ여성 관련 모든 행사를 적극 활용해야죠. 정대협 홈페이지(www.womenandwar.net)에서 한국어, 영어, 일본어로 서명할 수 있고, 곧 독일어, 불어, 중국어 및 실시간 집계 시스템을 추가할 거예요. 5월부터는 국제 행사가 줄줄이 예정돼 있어요. 당장 5월 말 스위스 제네바에서 국제노동기구(ILO) 총회가 열리고, 7월에는 미 하원의 결의안 채택 6주년을 맞아 각종 행사를 열고 현지 언론에서 이 문제를 적극 보도하게 하려면 미국에서 살다시피 해야 할 것 같아요. 8월 14일 ‘세계 위안부의 날’엔 서울과 일본에서 국제심포지엄을 열고, 9월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유엔 인권이사회에 맞춰 전시회, 세미나 등 각종 행사를 크게 열려고 해요. 북한도 초청할 계획이에요. 아무튼 내년 광복절까지 가시적인 성과를 얻으려면 올해는 세계 각지를 유랑하는 해가 될 것 같아요.
-2011년 8월 헌법재판소에서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것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지만, 1년 8개월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진전이 없는데요.
이명박 정부가 판결 직후 TF팀을 만들어 일본에 양자협의를 제안하고 10월 한일정상회담 때 1시간 중 45분을 위안부 문제에 할애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했지만, 국제중재재판 회부 등 적극적인 후속 조치를 하지 않은 게 문제죠.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무슨 생각이 있는 건지 도통 모르겠어요. 3ㆍ1절도 그냥 넘겨버렸고, 당장 ILO 총회에 대한 대책도 전혀 내놓지 않고 있어요. 정말 답답합니다.
윤 대표는 정대협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역사의 ‘산 증인’이다. 자타가 공인하는‘천생 활동가’지만, 어릴 적 꿈은 목사였단다. “2남2녀의 맏딸로 농사일로 바쁜 부모님을 대신해 동생들 다 키우면서도 공부를 꽤 잘했어요. 경남 남해가 엄청 보수적인 동네잖아요. 여자 친구들은 다들 국민학교만 나와 공장에 일하러 가는데, 저희 부모님은 저를 고등학교 보내려고 수원으로 이사할 정도로 교육열이 높았어요. 중2 때 시각장애인 여자 목사의 수기를 읽고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딸년 공부시켜 뭐하냐’고 울 엄마를 구박하던 큰아버지 위에 군림할 수 있겠다 싶은 거예요.(웃음)”
그는 한신대 신학과를 나와 이화여대 대학원(기독교교육)에 재학 중 우연히 ‘현대판 위안부’로 불리던 기생관광 실태를 접한 뒤 목사의 꿈을 접고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92년 간사로 정대협에 발을 디딘 그는 임신한 몸으로, 조작 간첩사건에 연루된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면서도 수요시위를 거르지 않았고 해산 후 한 달도 못돼 다시 나올 만큼 억척스럽게 일했다. 98년 한 할머니가 그에게 횡령 혐의를 씌워 검찰 조사까지 받은 뒤 회의가 들어 정대협을 떠났던 그는 2002년 다시 돌아왔다. “부채의식이랄까, 저를 딸처럼 믿고 의지했던 할머니들이 눈에 밟혔어요. 특히 고 강덕경 할머니는 제가 결혼할 때 이불 장만하라고 당신 한 달 생활비인 20만원을 억지로 쥐어줄 정도로 정이 많으셨어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 ‘우리가 끝까지 싸울 테니 편히 가세요’ 했는데, 어떻게 잊겠어요. 김복동 할머니가 맨날 그러세요. ‘처음 만났을 때 60대 아줌마였던 나는 꼬부랑 할매가 됐고, 20대 아가씨였던 미향이는 아줌마가 돼 같이 늙어간다’고. 그렇게 20여년을 살았네요.”
윤 대표는 최근 고 문익환 목사를 기려 제정한 늦봄 통일상과 모교에서 주는 올해의 한신상을 잇달아 받았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문 목사의 시 ‘잠꼬대 아닌 잠꼬대’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벽을 문이라 지르고 나가야 한다는…’ 이 말을 좌우명 삼아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위안부’ 문제 해결 말고 개인적으로 꼭 이루고픈 꿈이 있는지 물었다. 천생 활동가다운 답이 돌아왔다. “정대협이 엄격히 말하면 임시협의체이고, 마냥 모금 활동에만 의지할 수도 없어요. 큰 꿈은 박물관과 나비기금, 할머니들 쉼터, 앞으로 지을 ‘치유와 평화의 집’ 등을 아우를 수 있는 나비재단을 만드는 거예요. 작은 꿈으로 각 단체에서 일하는 여성 활동가들에게 명절 때 작은 선물이라도 줄 수 있는 활동가기금도 만들고 싶어요.”
선임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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