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코메티의 진품을 2만유로(2,949만원)에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사기 당해도 쌉니다. 미술품 시장은 썩었거든요.”
로베르트 드리센(54)은 태국 타이만 해변의 야자수 그늘에서 백포도주를 마시며 독일 주간 슈피겔 기자에게 냉소적으로 말했다. 자신이 위조한 조각상을 구입한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서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태국에서 8년째 살고 있는 그는 스위스 출신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청동 작품을 1,000점 이상 위조한 혐의로 독일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다. 판매책이었던 공범 2명은 독일에 수감돼 있다.
20세기 대표적 미술 거장인 자코메티는 오늘날 작품 값이 가장 비싼 조각가다. 3년 전 레바논 은행가의 부인은 그의 대표작 ‘걷는 사람’을 소더비 경매에서 7,400만유로(1,091억원)에 낙찰받았다. 가늘고 길쭉한 몸피, 금세 바스라질 듯 거친 표면의 청동인물상은 누구나 자코메티 작품임을 알아챌 만큼 개성적이다.
500점이 채 안되는 것으로 알려진 자코메티의 작품은 지금 몇 점이 남아 있는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가 청동상의 틀인 석고 주형에 대한 제작 기록을 남기지 않은 탓이다. 이런 혼란은 역으로 미술품 위조꾼에게는 최적의 조건이다. 드리센은 진품을 복제하는 수준을 넘어 아예 없던 작품을 만들어 자코메티가 거래하던 주조공장의 각인을 새겼다. 그는 “자코메티 작품은 워낙 특징이 강해 만들기도 쉽다”며 “작은 것은 30~40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네덜란드 동부 아른헴에서 태어난 드리센은 16세에 학교를 중퇴하고 생계를 위해 풍경화를 그려 팔았다. 그러다가 독일인 거래상에게 19세기 네덜란드 낭만주의 회화를 모사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그는 벼룩시장에서 오래된 그림을 산 뒤 물감을 제거해 구식 캔버스를 확보했다. 30년 넘게 이어진 미술품 위조 인생의 시작이었다.
판매가 신통치 않자 드리센은 에밀 놀데, 와실리 칸딘스키 등 20세기 독일 표현주의 작가로 ‘상품’을 바꿨다. 때론 원본 그대로 그렸고 때론 여러 작품에서 모티프를 따와 새 그림을 그렸다. 주문이 쏟아졌다. 한 점당 가격은 500~700유로. 덕분에 그는 아른헴에 침실 11개와 욕실 6개, 꼭대기층에는 스튜디오 3개가 있는 고급빌라를 임대할 수 있었다. 차는 BMW로 바꿨다.
드리센은 “전부 다해서 1,000점 넘게 그렸을 것”이라며 “한두 점은 아마 독일이나 네덜란드 미술관에 걸려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는 한 거래상이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에서 자신이 그린 그림을 팔았다고 회고하며 “위조품이라는 걸 알고 팔았을 거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1987년 드리센은 조각상 위조에 나섰다. 복잡한 제작과정에 비용도 많이 들긴 했지만 일단 주형을 만들면 복제하기 쉽고 무엇보다 작품 거래가 용이했다. 진품이 생산량이 통제되지 않은 채로 위조품과 뒤섞여 유통되는 조각상 시장의 혼탁함 때문이다. 청동 주조 공장에서 작가의 주문보다 많은 작품을 생산하거나 따로 복제품을 만들고, 작가 사후 주변 인물들이 임의로 작품을 추가 제작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 이 바닥의 현실이다.
아른헴 최고의 청동 주조 기술자에게 라텍스 재질의 주형을 대거 구입한 드리센은 오귀스트 로댕, 앙리 마티스, 빌헬름 렘브루크, 에른스트 바를라흐, 케테 콜비츠 등 일류 미술가들의 청동상을 복제했다. 1920~30년대 바를라흐와 콜비츠의 작품을 주조했던 독일 베를린의 헤르만노악 주조공장에 감정을 의뢰해 진품 판정까지 받았다.
자신감을 얻은 드리센은 권위있는 독일 미술잡지에 판매 광고를 냈다. 렘브루크 복제품을 4만2,500유로(6,266만원)에 구입한 고객은 독일 최대 갤러리를 소유한 미술품 거래상 미카엘 베르너였다. 이 짝퉁 청동상은 브레빈에 있는 그의 갤러리 정원에 버젓이 서있다.
드리센이 자코메티 모조품을 처음 만든 때는 1998년. 자코메티의 작품 스타일과 서명, 그가 거래한 주조공장 각인까지 면밀히 분석해 제작한 높이 2.7m의 작품에 자코메티의 부인 이름을 딴 ‘아네트’라는 제목을 붙였다. 첫 고객 3명 중에는 독일 마인츠에서 온 골동품 거래상 귀도가 있었다. 귀도가 6,000마르크(360만원)를 주고 40㎝ 이하의 작은 청동상 12점을 추가 주문한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매주 만나 자코메티 위조품을 거래했다.
드리센이 제작하고 귀도와 그의 동료 로타르가 판매를 맡은 ‘자코메티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미술품에 문외한인 부자들이 공략 대상이었다. 독일 비스바덴의 억만장자는 350만유로(51억6,000만원)를 내고 49점을 구입했고 슈투트가르트의 투자매니저는 18점에 370만유로를 지불했다. 이들은 위조품의 행적을 파악하는 직원을 따로 뒀고, 판매한 물건을 되사서 거래 이력을 세탁했다. 심지어 귀도는 무죄를 입증할 알리바이까지 만들어냈다. 위조품 제작자가 자코메티의 동생으로 형의 청동상 주조를 도맡았던 디에고라는 내용의 책을 쓴 것이다. 국제표준도서번호(ISBN)까지 표기된 이 책은 물론 출판된 적 없는 가짜였다.
드리센은 2005년 가족과 함께 태국으로 이주한 후에도 네덜란드를 오가며 사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2009년 8월 그의 동료들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위조품 5점을 거래하다가 경찰에 체포되면서 위조 행각은 막을 내렸다. 법정에서도 디에고와 잘 아는 사이라며 무죄를 주장한 로타르는 징역 9년, 귀도는 징역 7년4월을 선고받았다. 드리센 역시 수사 대상이지만 독일 국적자가 아니라서 신병이 인계되지 않고 있다. 경찰은 지난해 6월 그가 만든 청동 5톤 분량의 위조품을 주조공장에서 압수, 처분했다.
드리센이 미술품 위조로 벌어들인 돈은 최소 300억유로(44조원). 그는 “더 이상 유감없고 이곳에서 수감되더라도 최악의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만 “나와 내 작업에 대해 세상이 알아야 할 시간이 왔다”며 인터뷰에 응한 이유를 밝혔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