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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기 전에 배신하면 돼" 운명에 맞서는 한 여인의 투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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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림받기 전에 배신하면 돼" 운명에 맞서는 한 여인의 투쟁기

입력
2013.04.1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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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이래 소설의 본격적인 주제가 아니었다. 이제 소설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한 인간을 파멸의 수렁으로 몰아넣는 광포한 운명의 타격이 아니라 이렇다 할 흔적도 없이 우리를 쇠진케 하는 하루하루의 일상이다. 그리스 서사시 시대를 주름잡았던 이 거대하고 매력적인 주제는 모더니티의 빛나는 광휘 아래 시대적 적실성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나카무라 후미노리(36)의 장편소설 은 그리스 영웅 서사시의 세계를 현대 일본에 복구하려는 야심찬 시도처럼 보인다. 워싱턴포스트의 표현마따나 아쿠타가와상, 노마문예상, 오에 겐자부로상 등 "이미 받은 문학상 트로피들의 무게로 무릎이 휘청거릴 정도"인 이 젊은 작가는 운명에 맞서는 한 여인의 투쟁기를 섬뜩하면서도 아름다운 서스펜스 미스터리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젊고 아름다운 유리카는 배신의 순간에만 열기를 느끼는 가짜 매춘부다. 사회 저명인사를 유혹해 치명적 약점이 될 만한 사진과 동영상을 제조하는 게 그녀의 일. 정확히는 모르지만 그저 검은 조직일 것이라 짐작하는 곳의 의뢰를 받고 임무를 수행하면 그녀에게는 거액이 주어진다.

부모에게 버려져 보육원에서 자란 유리카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삶에 대한 희망이나 낙관 같은 게 없었다. 공원 잔디밭에서 뛰노는 아내와 딸을 벤치에 앉아 행복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을 때, 자신도 모르게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치마를 들춰 올릴 정도로 이미 내면이 왜곡돼 있다. 아저씨가 아빠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런 짓을 하면 안 되지'라고 타일렀을 때, 어린 유리카는 알 수 없는 분노와 모욕감에 휩싸여 울며 속옷을 벗어버린다. 그리고 소리치며 경찰을 부른다.

'그건 어쩌면 부조리한 복수였는지도 모른다. 그 아저씨에 대해서라기보다 나를 둘러싼 인생이라는 것에 대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거라면 죄다 부서져버려. 버림받기 전에, 관심 없다고들 생각하기 전에, 내가 이 세계를 배신해버리면 된다. 나는 몸에 열기를 느꼈다. 뜨겁게, 어떻게도 할 수 없을 만큼 뜨겁게.'

사랑은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이다. 사랑하는 이가 없는 자는 세상 누구보다도 강하다. 유리카는 보육원 친구 에리가 교통사고로 죽고, 에리의 아들 쇼타마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치병으로 죽어가자, 쇼타의 치료비를 대기 위해 유사 매춘 형태의 범죄에 발을 들여놓는다. '그건 쇼타에 대한 선량한 배려도 아니고 에리에 대한 의무를 다하려는 마음도 아니었다. 이 아이를 사로잡은 운명 같은 것을 어떻게든 배신해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유리카는 왜 자신의 수술비를 대기 위해 애쓰냐는 쇼타의 질문을 받고 문득 쇼타를 끌어안는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하고 만다.

'나는 네가 필요해. 나는 네가 필요하고, 그래서 나는 너를 위해 뭐든 할 거야. 이 세계는 너의 탄생을 환영했어. 적어도 나는 그래. 어서 오너라 하고. …넌 무뚝뚝하고 귀염성도 없지만, 아무렴 어때. 누가 어떻게 생각하건 내가 좋아하는데.' 하지만 쇼타는 죽고, 유리카는 운명을 배신하려는 획책에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극복하지 못한 절망과 비탄까지, 이 모든 것은 거대한 악의 화신 기자키가 기획하고 연출한 드라마였다. 기자키는 이 세계를 수준 낮은 신이 설계했다고 믿는다. 세계가 고통과 불합리로 가득한 것이 그 증거다. '어째서 너냐고? 아득한 옛날부터 이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줄기차게 내뱉었던 말이지. …이런 세계를 누구보다 즐기고 있는 건 신이야.'기자키는 마치 신처럼 유리카의 목숨을 담보로 끊임없이 성취 불가능해 보이는 과제를 제시한다.

유리카의 운명을 손에 쥐고 뒤흔드는 가자키와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유리카의 사투는 시종 교교한 달밤 아래 섬뜩하고도 아슬아슬하게 펼쳐진다.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이 뛰어난 이 소설은, 후미노리의 애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천재 소매치기 청년의 이야기기를 그린 전작 의 자매편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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