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74)의 새 장편소설 은 동학군 지도자 전봉준의 이야기를 다룬 역사소설이다. 그런데 전봉준의 40년 생애 중 이 두툼한 소설이 다루는 것은, 그가 전라도 순창의 피보리에서 민보군에게 붙잡혀 한양으로 끌려가기까지, 119일간의 시종 참담하고도 치욕스러운 천 리 길 여정이다.
전봉준은 소설의 첫 장면부터 패장으로 등장해 참수형으로 목숨을 잃는 마지막 장면까지 시종 패장일 뿐이다. 자신의 패배로 조선땅을 백성들의 피를 붉게 물들였다는 자책은 소설의 중심 서사를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주인공의 내적 번민의 문제로 수렴시킨다. 스스로 혀를 물고 자결할 것인가, 이토 히로부미의 회유를 받아들여 일제의 앞잡이로 변모할 것인가, 동학군의 장군답게 장렬한 최후를 맞을 것인가.
작가는 전봉준의 최후를 예수의 최후와 포갠다. 예수가 유다에게 밀고를 제안하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삶을 얻었듯이, 어디로도 패퇴할 길 없는 전봉준은 자신을 배신한 부하 김경천에게 유다처럼 자신을 밀고할 수 있도록 미끼를 던진다. '전봉준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잡으려 하는 자들에게 잡혀주는 것이었다. 그는 독한 말씀 하나를 뼛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나를 죽이되, 종로 네거리 한복판에서 참수하고 오가는 사람들의 옷자락에 피가 튀게 하라. 나의 피가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번져가게 하라.'
소설 속에는 입에 재갈이 물리고 발목이 부러져 꼼짝도 할 수 없는 전봉준이 포승줄에 묶인 채 자신을 배반하고 압송길의 가마꾼 노릇을 하는 자들의 손을 빌어 소피를 보고 그들의 어깨에 몸을 얹고 대변을 보는 장면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구역질 나도록 치욕적인 전봉준의 마지막 나날들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일 터이다.
이 치욕이 다다르는 곳은 결국 지독한 절망과 고독이다. 가마에 실려 압송되는 전봉준은 화승총을 쏘아대며, 죽창을 치켜들며, 위아래 없이 다 함께 진격하던 과거의 벅찼던 거사를 기억한다. '그때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배신 당한 자의 비애와 끝내 배신하지 못하는 자의 고독이, 마디마디 절규처럼 끊어지는 짧은 문장 속에서 메아리 친다.
작가는 "마지막 여정에서 전봉준이 만난 개 같은 세상을 보면서 나는 진저리치며 구역질을 하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며 전봉준이야말로 "개 같은 세상 속에서의 참사람 하나"라고 작가의 말에 썼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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