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삶과 문화] 영어로 작업하는 한국 디자이너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영어로 작업하는 한국 디자이너

입력
2013.04.18 12:01
0 0

"한국에서도 싱가포르나 필리핀처럼 영어가 공용어인가요?" 독일 디자이너들에게 '한국 그래픽 디자인'을 소개한 직후에 받은 질문이다. 과연 영어를 적용한 작업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평소에는 한국어로 사고하고 대화하던 한국인 디자이너가 한국인을 대상으로 만든 포스터나 표지에서는 갑자기 영어로 소통한다. 왜 그럴까?

한글로 작업을 빠르고 효과적으로 마치기는 쉽지 않다. '쓸만한' 한글 폰트의 다양성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온갖 상황에 대처하며 시각적 뉘앙스를 적절히 표현하기에 힘이 든다. 그럼 한글 폰트를 개발하여 문제를 해결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려면 누군가 큰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여기서 잠깐, 아니 이 봉이 김선달같은 양반아, 세종대왕이 만드신 모두의 문화유산 한글에 비용이라니? 불호령에 본의가 흐려지지 않도록, 몇 가지 해묵은 질문들을 명료하게 짚어보자. 우선, 모든 한글 폰트 디자인의 원작자는 세종대왕인가? 아니다. 문자 시스템인 한글과 그 표현형인 한글 폰트는 범주가 다르다. 세종대왕이 굳이 원저작자라고 할 수 있는 '글자체 디자인'은 경자자체와 갑인자체이다. 다음, 저작권법에 의하면 폰트 디자인은 저작물이 아니잖은가? 그렇다. 전문가 입장에서 대법원 판례의 부당함을 따져 묻는 기회는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자. 한편, 무료 폰트들도 있지 않은가? 그 비용은 특정 기관이 사용자를 대신하여 부담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폰트들의 쓰임새는 대개 해당 기관의 요구에 종속된다. 마지막으로, 폰트 회사들의 강매를 옹호하는가? 그럴 리가. 폰트 회사들은 가격 및 라이선스 정책을 소비자에게 투명하게 납득시키도록 애써야 한다.

한글 다양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재능과 의지를 가진 독립적인 폰트 디자이너들이 다각도로 접근하여 쓸만한 폰트를 공급해야 한다. 이런 요청을 만족스럽게 완수하는 데에는 오랜 연구와 경험을 통해 습득되는 몇몇 소양들이 필요하다. 첫째, 폰트 디자인은 세심한 주의력을 요구하는 분야인 만큼, 미세한 차이에 민감해야 한다. 둘째, 텍스트를 대하는 지적인 감수성이 필요하다. 셋째, 한글뿐 아니라 문장부호, 숫자, 라틴알파벳, 한자 등 각종 코드 형태의 연원과 구조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넷째, 각종 글자체의 양식이 처한 역사와 문화의 맥락을 숙지해야 한다. 다섯째, 글자가 구현되는 환경의 기술적 원리를 이해해야만 그에 최적화된 형태를 도출할 수가 있다. 여섯째, 한글은 라틴 알파벳과는 공간 구성의 원리가 근본부터 다르다. 동양 특유의 공간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여기에 글자수는 좀 많은가? 기본이 2,350자, 제대로 갖추려면 1만1,172자이다. 적게는 수개월, 많게는 수십 개월, 모든 소양을 바쳐 전념해야 한글 폰트 한 벌이 완성된다.

최근 몇 년간 정식 출시된 개인 디자이너의 폰트 중에 고운한글체와 안삼열체가 돋보인다. 이 디자이너들이 오랜 기간 재능을 헌신하여 얻은 출시 첫 해 수익은 얼마나 될까? 작업실 월셋값 한두 달치에 불과한 것으로 안다. 물론 경제적 보상만을 위해 이 까다로운 일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작자에 대한 명예와 인격적 이익이라도 충분한가? 저작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률은 이들의 권리를 배척했다. 일반의 인식은 참담한 수준이다. 한글을 아름답고 쓸모있게 매만지는 이들의 노고에 비용을 지불하기는커녕 최소한의 존중을 갖추는 데조차 인색하다. 이러니 제도적 지원이 필요한들 어디에 기대겠는가. 작업에 몰두하기도 부족한 시간을 쪼개어 자구책 마련에 여념이 없다. 한글 디자이너는 계속 배출되어야 하지만, 생계도 영예도 회의적인 이 일에 뛰어들겠다는 학생 앞에서 선생님들은 염려가 앞선다.

바쁜 우리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은 오늘도 마감에 쫓긴다. 한글로 작업을 빠르게 잘 마치기는 쉽지 않다. 좀 치사하지만, 꼭 맞는 말투를 선택할 여지가 질적으로 넘치도록 확보된 라틴 알파벳에서 답을 구하는 수 밖에. 이런 작업을 보며 외국의 디자이너들은 질문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영어가 공용어인가요?"

/유지원 타이포그래피 저술가·그래픽 디자이너

유지원 디자이너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