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홍콩에 갔을 때 대접하는 이들이 손님에겐 '산 미구엘' 정도는 먹여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칭다오'만으로도 괜찮다"며 웃었던 적이 있다. 하이트와 카스를 마시던 내겐 '칭다오'도 고급맥주였다. 도쿄의 밤거리에서 마신 '에비스' 생맥주는 그저 마시는 것만으로도 이런 쾌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황홀했다. 부드럽고 달콤한 케이크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만 같았다.
물론 한국 맥주들도 많이 발전했다. '맥스'나 '골드 라거' 같은 것들은 다른 맥주와 같은 가격으로 판다는 것이 고마울 정도다. 수입맥주들만큼 맛있지는 않더라도 저렴한 가격으로 맥주가 공급되는 탓에 '말아먹는' 것을 포함해 저소득층도 큰 부담없이 애주가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가끔 주머니 사정이 좋을 때 호사를 누리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고, 그럴 때 선택지가 수입맥주 밖에 없다는 건 조금 슬픈 일이다.
민주당 홍종학 의원이 대표 발의하는 주세법 일부 개정안은 이런 사람들을 위한 것인 것 같다. 개정안은 두 개 업체가 과점하고 있는 현재의 맥주시장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을 목표로 한다. 중소기업과 영세업체가 고급맥주를 만들어내면 맥주가 다양해지고 맛도 더 좋아지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는 이 법안이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경제민주화의 일환이라고도 했다. 지극히 추상적인 국정기조를 지극히 구체적인 영역 안에 내려 앉힌 훌륭한 정책발의다.
홍 의원의 발의는 한 보수언론이 작년 내내 특집으로 때렸던 '주폭 척결' 보도와 비교된다. 물론 경찰청장이 '주취폭력'이란 조어를 만들어내고 음주 상태에서 일어난 범죄에 대한 단속을 광범위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높게 평가해야 할 일이라 생각한다. 얼마 전 퇴임한 김용판 서울경찰청장은 2011년 충북경찰청장을 할 때부터 '주폭과의 전쟁'을 벌였다. 아마도 그는 그런 활동을 통해 범죄율이 줄어든다는 걸 체감했을 것이고 그래서 서울에서도 같은 활동을 벌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속이 임무인 경찰의 구호를 언론사가 하나의 사회문제로 제시하는 것은 전혀 다른 맥락일 것이다. 삼성언론상까지 수상한 조선일보의 기획특집 "술에 너그러운 문화, 범죄 키우는 한국"이 힘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특집의 내용들을 보면 결국 노숙자, 일용직 노동자, 결혼이주여성, 이주노동자 등 다양한 영역의 사회적 약자들이 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는 상황을 '주폭'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꿰맨다.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고 줄이는 사회정책을 고민하지 않고 천원이면 소주 한 병 사서 쉽게 취할 수 있는 세상, 많은 점포에서 24시간 내내 술을 판매하는 세상을 바꾸지 않으면 범죄를 근절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한국인들이 술을 굉장히 많이 마시는 것 같지만 최근의 조사결과를 보면 OECD국가 중 중간 수준에도 못 미친다. 증류주란 이유로 보드카 등과 같은 취급을 받던 소주 소비를 실제 도수에 따라 보정하니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이 줄더라는 것이다. 빠른 시간에 죽을 듯이 술을 먹이는 문화는 술 소비량 자체와는 큰 관련이 없을 것이다. 술을 범죄나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보는 시각도 지나치게 피상적이다.
형사정책을 연구하는 이들은 "좋은 사회정책이 가장 좋은 형사정책"이라고 말한다. 범죄라는 증상의 원인은 사회문제에 있다는 것이다. 격차사회란 말로까지 표현되는 양극화 현상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엄한 처벌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즉각적인 효과를 선호한다. 주폭 척결의 논리엔 이러한 엄벌주의의 시선이 담겨 있다. 격차사회가 엄벌주의와 결합하면 다수 빈곤층을 감옥에 수용하는 격리사회가 탄생한다.
경범죄처벌법에 집중하는 현 정부의 정책기조도 이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홍종학 의원의 맥주사랑이야말로 격리사회에 대한 가장 치열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맛있는 맥주는 경제민주화와 관련이 있는 게 맞다.
한윤형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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