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사람들은 만나면 정치를 말하고, 새 정부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를 한다. 그럴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화두가 '소통'이다. 모든 문제는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고, 소통만 되면 마치 세상사 모든 일이 다 풀릴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언론도 연일 대통령에게, 정치인들에게 그렇게 주문한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통은 쉽다. 자연스럽게 일치와 공감이 이뤄진다. 소통은 서로 다른 생각과 주장, 입장과 가치관이 다를 때 문제가 된다. 우리사회의 소통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상대방의 그 '다르다'를'틀리다'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사실과 의견을 혼동하고, 자신과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의견을 진실로 믿어버린다. 우리사회에는 늘 이런 이기적 진실이 두 개씩 존재한다. 개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진실)에서조차도 그렇다.
이렇게 사실과 의견을 혼동하고, 내 생각과 맞는 의견을 진실이라고 굳게 믿는 집단이 양극단으로 갈라져 사사건건 시비하고, 반대하고, 자기주장만 고집하는 한 소통은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류춘렬 교수(국민대 언론정보학과)는 그게 아니라고 했다.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사실과 의견은 동일하다. 이를 인정하지 않으면 대화와 토론도, 소통과 공감도 없다"는 것이다.
경찰과 시위대가 몸싸움을 벌였다. 상처는 없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은 "경찰이 때렸다"고 하고, 경찰은 시위대의 불법점거를 막기 위해 "밀었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보도하는 신문도 마찬가지다. 보수 신문은 경찰, 진보 신문은 시위대의 주장을 '사실'로 싣는다. 독자들 역시 그것을 그냥 받아들인다. 사실, 사실보도여부는 몰라도 된다. 관심도 없다. 내 편, 내가 좋아하는 신문이기에 무조건 믿는다. 그렇다면 '때렸다'와 '밀었다'는 사실일까, 의견일까. 사실이면서 의견이라는 것이다. 사실과 의견이 동일한 이유다.
의견이 곧 사실이고, 그런 사실이 양극단으로 늘 두 개씩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토론도 무의미하다. 논쟁으로 일관하면서 적대감만 강화시킬 뿐이다. 오랫동안 TV 토론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았던 한 교수는 "토론이 합리적 합일을 도출해 내는 역할을 하기 보다는 거꾸로 의견의 양극화와 갈등만 더 부추긴다"고 했다. 실제 중립적 의견이 우세하고, 합리적 합의로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사안도 토론에 붙이면 양극단으로 갈라지고, 풀기 어려운 문제로 바뀌고 만다.
언론도 다르지 않다. 토론과 마찬가지로 지지세력만을 의식한 충성도를 과시하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론 의도적으로 토론의 주제로 올리고, 정보를 과장해 언론에 흘려 이슈로 만들기도 한다. 토론이 미지근하거나, 혹시 원만하게 토론이 진행돼 두 가지'사실'에 대해 합의라도 하면 오히려 실망한다. 군중(Crowd)만 있고 공중(Public)이 없고, 언론에 중도가 없는 사회다. 이런 비정상적 사회구조가 20년 가까이 계속되고 있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 때도 그랬다. 자리만 바꿔 앉았을 뿐이었다. 박근혜 정부인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다. 정말 한번 호된 비용을 치르지 않고는 쉽사리 바뀔 것 같지도 않다.
이런 현실에서 무조건 어느 한쪽을 향해 소통하라고 말하지 마라. 이럴 때 소통은 이해와 공감이 아니라 일방적 양보와 패배를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두 개의 사실의 합의가 아니라 하나를 버리거나 고집하는 것은 소통이 아니다. 대화와 토론, 소통과 공감은 한줄기다. 대화와 토론을 통해 상대의 생각과 주장을 수용할 줄 알아야 소통도 시작되고, 공감도 생긴다. 자신의 이익과 경험, 기억만 고집하면 대화부터 중단된다. 우리가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의 이익과 경험과 기억을 공유해 나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다.
어떤 것에 대한 의견과 평가를 자신과 똑같이 만들려고 하는 한 소통은 불가능하다. 나부터 내가 아는 사실과 다른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남들이 다르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미국 시카고대 조셉 윌리엄스 교수는 에서"그렇게 못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없다는 의미'라고 했다. 스스로 자신 있는 사람만이 소통할 수 있다.
이대현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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