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경
갤러리 류가헌 관장
시인이자 무용평론가로 알려진 고 김영태 선생은 상대적으로 화가로는 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본 사람들은 혹은 그가 문학과지성사가 발행하는 시집 표지의 캐리커처를 그린 이와 동인인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김영태 선생이 그림에도 빼어난, 말 그대로 ‘전방위예술가’였다는 데 주저 없이 동의할 것이다.
선생은 자신의 자그마한 체구처럼 작은 그림들을 즐겨 그렸다. 문예회관대극장에 고정좌석이 있을 정도로 무용을 좋아했던 선생이니, 그림에도 발레리나와 토슈즈가 많이 등장한다. 그 외에 자주 그려진 것이 피아노다. 작은 피아노들, 노릇하게 잘 구워진 빵 같은 피아노도 있고, 다리가 세 개 밖에 없는 피아노도 있다. 에릭 사티의 연주를 즐겨 들으셨으니 피아노도 그 연장선에서 상상했었다.
그런데 얼마 전, 김영태 선생의 오래된 소묘집 한 권을 얻게 되었는데 거기에 자신이 왜 그렇게 피아노에 연연하는 지가 쓰여 있었다. 유년 시절, 후에 시인이 될, 무용평론가이기 이전에 열렬한 관객이자 탐미주의자가 될 어린 김영태에게 피아노는 이상향 같은 것이었다. 물론 유토피아의 뜻이 지상에는 없는 것이듯, 어린 김영태도 피아노를 가질 수 없었다. 그때의 갈망이 노년이 된 이후까지도 그로 하여금 피아노 그림을 그리게 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나에게는 책이 그렇다. 개인사적이라기보다 시절이 가난하고 궁핍했던 것이라고 믿고 싶은 내 유년시절에는, 모든 것이 넉넉하지 않았다. 책도 마찬가지여서, 두 살 터울 남동생이나 나나 교과서 외에 동화책과 같은 다른 책들을 소유할 기회가 없었다. 동네에 계몽사 세계어린이문학전집 세트를 가진 또래 친구가 있었는데, 책들을 보고 싶어 그 애에게 잘 보이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신발주머니를 들어주고 그 애 집 마당의 꽈리를 불어주어, 간신히 양장표지의 전집이 있는 그 애 방에 들어가곤 했다. 책을 읽으면, 잊어버리지 말아야지 하고 마치 씨앗을 뺏길까 꽉 다문 꽈리처럼 붉게 부풀어서는 집으로 돌아와 동생에게 책의 내용을 들려주었다.
동생과 초등학교를 나란히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인가, 엄마가 어린이날 선물로 동화책을 한 권씩 사주셨다. 동생에게는 , 나에게는 이었다. 그 책을 얼마나 소중히 읽고 읽었는지, 또 동생과 바꾸어 보고 다시 바꾸어 보고 했던지... 지금도, 고래 뱃속에 등불을 켜고 피노키오와 피노키오를 찾아 나선 할아버지가 마주 앉아있던 장면을 그대로 따라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뱃속에 등불을 켰으니 얼마나 뜨거울까, 동생과 고래를 걱정하기도 했다. 청소년기에 친구들이 고민하던 얼굴의 주근깨가 내게는 보조개만큼이나 부러웠던 것도, 어쩌면 빨간머리 앤 때문인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어려운 일에 맞닥뜨려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명랑하고 용감하게 살아 낸 부분이 있다면, 그 역시 어린 시절 읽은 빨간머리 앤의 정서적 인자가 어딘가에 숨어있는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책을 자력으로 사서 볼 수 있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충실히 그렇게 했다. 보고 싶은 책이 있으면 망설이지 않고 샀다. 바로 읽지 못하여도 언젠가 봐야지 하고 곁에 쌓아둔다. 돌려보고 나눠보는 것이 미덕임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밑줄을 그어서... 종종 다시 펼쳐본다’ 등의 여러 이유로 웬만해서는 빌려주지 않고 욕심을 부린다. 돌려받지 못하면 잃어버린 퍼즐 한 조각처럼 어딘가가 영 허전할 것 같아서다.
밤에, 김영태 선생의 소묘집을 다시 펼쳤다. 피아노를 보다 아주 오랜만에 피노키오와 빨간머리 앤이 생각났다. 그리고 지금 꼭 나와 동생이 그 책들을 선물 받았을 무렵이 된, 조부모 품에서 자라는 외동이 조카를 떠올렸다. 조카에게, 휴대폰 문자를 보낸다. ‘윤서야, 보고 싶은 책 있으면 언제든 고모한테 문자해. 그러면 집으로 책이 배달될 거야. 왜냐면 고모는 너의 책 자판기니까.’
조카의 책 자판기. 앞으로 내가 될 사람으로, 꽤 괜찮은 역할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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