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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이야기] 동백의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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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이야기] 동백의 계절

입력
2013.04.15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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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오동도에 동백이 만개해 있다고 숙소주인이 일러줬다. 일 년 중 며칠 안 되는 기간이니 꼭 들러보라고 했다. 추천을 따랐다. 말 그대로였다. 붉은 꽃이 나무에 절반, 바닥에 절반. 겨울에 피는 꽃인 줄 알았더니 딱히 그렇지는 않은 듯 했다.

하지만 때마침 잘 왔네, 싶기보다는 겨울 쪽으로 한 호흡 빨라야 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앞섰다. 동백은 뭐랄까, 색깔에서나 모양에서나 탁하고 처절한 기운이 감돈다. 오래 묵은 한이 터져 나온 듯도 하고 누구 말마따나 피를 토한 자국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에이프릴'의 화사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생각을 해서였을까. 숲길 한쪽에 누군가 남긴 사랑의 흔적을 보고는 움찔했다. 바닥에 떨어진 꽃들을 잔뜩 모아 만든 커다랗고 붉은 하트. 갸륵한 정성이 분명했지만, 풋풋한 첫사랑을 기념하는 하트라기보다는 정념의 환멸 속에서 펄떡거리는 심장처럼 보였다.

철학자 지젝의 동영상 강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꽃밭에 물을 주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꽃들이 역겹다고 생각합니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에요. 성기를 드러내놓고 나비나 벌을 유혹하는 셈이죠. 자기를 범해달라고 간청하는 거에요. 꽃에는 미성년자관람불가 등급을 매겨야합니다.' 발상의 전환에 따른 재밌는 농담이라고만 흘렸는데, 지금은 꽃의 세계를 다른 시각에서 보게 만든다. 오동도 동백의 이 처연하고 외설스런 기운이야말로, 꽃들의 본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하는.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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