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가면서 '꼰대'가 되어 가는 것인지, 수업 중 학생들이 보이는 예의 없는 태도에 대해 점점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를 느낀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찾아뵌 지도교수님께서는 오히려 나이가 들어가면서 학생들의 거슬리는 행동에 관대해지신다고 했다. 스스로의 분석으로는 자가 운전을 그만두신 이후로 맘이 많이 편해지셨다고 한다. 나도 생각해보니 아침에 운전대를 잡고 30여분을 분노한 상태로 출근한 날은 뭔가 불편한 일이 벌어지곤 한다.
사실 스트레스는 동물들이 살아가고, 적응하고, 생식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반응이다. 생물들은 잡아먹히지 않고, 다른 경쟁자를 물리쳐 짝짓기에 성공하고, 또 좋은 먹이와 물을 구하기 위해, 외부 환경의 변화를 자신의 신체 반응으로 변환시키는 기작을 가지고 있다. 즉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필요한 경우 환경 변화에 맞추어 자신의 몸을 긴장한 전투태세로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전문용어로 설명하자면, 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축(Hypothalamic-Pituitary-Adrenalin Axis), 줄여서 'HPA축'이라 불리는 기관에서 일어나는 기작으로 이루어지는 생물학적인 반응이다. 외부에서 경쟁이나 위협의 상황이 일어나면 뇌 속의 시상하부, 뇌하수체의 반응을 거쳐서 부신이라는 기관에서 여러 가지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며, 이들은 몸을 매우 긴장한 상태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얌체처럼 갑자기 끼어드는 차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며 입에서 나도 모르게 육두문자가 나올 때 일어나는 바로 그 신체 반응이다.
HPA축 반응은 생물들 특히 사회적 위계를 지니고 있는 척추동물들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알려진 기작이다. 생물들은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를 통해 생존과 생식의 성공률을 높이지만, 거기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 지나친 분비는 심장에 악영향을 끼치고, 신체 여기저기에 부작용을 일으킨다. 대다수의 포유류에서 수컷의 평균 수명이 암컷보다 짧은 것이 이 호르몬의 농도가 수컷에서 더 높다는 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1950년대 크리스찬이라는 생태학자가 수행한 선구적인 연구를 통해 HPA축이 개개의 생물뿐 아니라 생태계수준에서 일으키는 반응에 대해 널리 알려지게 된다. 당시에 생물 집단의 숫자를 결정짓는 요소는 외부의 환경이라고 믿었다. 즉, 먹을 것이 얼마나 있는지, 이들을 잡아먹는 포식자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등이 주 관심사였다. 그런데 크리스찬이 주목한 것은 생물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지면 생물자신이 HPA축 반응을 통해 스트레스 호르몬을 많이 만들어내고 이것이 성호르몬까지 영향을 미쳐서 새끼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들게 된다는 점이었다.
이후 HPA축에 대한 연구는 새와 같은 동물부터 인간과 유사한 유인원까지 다양한 생물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연구 결과는 우리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보였지만, 동시에 인간의 삶에서 헛된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몇 가지 시사점을 찾아볼 수 있다. 첫째, 사회적 지위가 안정적으로 대물림되는 생물들에서는 HPA축 호르몬 분비가 낮다. 예측 가능성을 높이고 과정의 공정성의 담보가 사회적 스트레스를 크게 줄이는 길이다. 둘째, 똑같은 경쟁 구조더라도 다른 환경요인 특히 먹이의 공급 정도에 따라 HPA축의 활동은 큰 영향을 받는다. 인간에 대해 얘기하자면 사회보장제도나 최소한의 필수품 공급은 스트레스의 영향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셋째, 어떤 경우에는 적절한 집단 내에서 존재하는 것이 스트레스 호르몬 농도를 낮춘다. 안정적인 가족관계, 지역 사회의 강한 유대감, 조직에서의 평안함 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알 수 있다.
오늘 밤에도 어김없이 저 멀리 취객들의 고함소리와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들려온다. 자신의 생존이나 번성과 아무 관련도 없는 쓸데없는 HPA축의 활동이다. 자신의 성공을 위한 이기적인 목적에서라도 주위의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거나 거꾸로 다른 사람의 행동에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자기 번성에 직결된 본업을 잘 수행하기 위해 받아야 할 스트레스이다.
강호정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