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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먹듯 지는데 응원할 맛? 우린 가족이자 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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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먹듯 지는데 응원할 맛? 우린 가족이자 한팀!"

입력
2013.04.1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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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일 오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강원 강릉종합운동장. 벤저민 니콜슨(25ㆍ영국)씨의 날카로운 외마디 외침이 눅눅한 공기를 타고 울려 퍼진다. 홈팀인 강릉시청팀 선수가 반칙을 하자 거의 반사적으로 터져 나온 소리였다. 그는 부산교통공사팀의 열성 서포터스 가운데 한 명으로, '마'는 부산 롯데자이언츠 야구팬들이 상대팀 선수 기를 죽이기 위해서 거의 독점적으로 쓰는 응원 구호다.

축구 내셔널리그 5라운드 강릉 대 부산의 경기가 열린 이날 강릉종합운동장 관중석 분위기는 좀 특별했다. 한국 미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출신 아홉 명으로 구성된 부산교통공사 다국적 서포터스가 부산에서 강릉까지 원정 응원을 왔다.

경기 시작 1시간 전부터 자리를 잡은 이들은 90분 경기 내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구호를 외치거나 응원가를 불렀다. 경기가 소강 상태일 때는 "최~강 부산", "이키쎄요(이기세요)"라며 목소리를 높였고, 부산팀이 수세에 몰리면 필사적으로 "디펜스(수비)"라 소리쳤다. 선수들을 위해 "고 포 잇(Go for it)"이란 제대로 된 표현 대신 "부산 파이팅"이란 콩글리시를 썼다. 상대편 선수가 쓰러지면 "할리우드 액션~", 불리한 판정이 나오면 "심판!"이라 외치는 걸 보면 영락없는 한국인 서포터스의 모습이다.

다국적 서포터들의 열광적 응원 덕분에 이날 경기는, 적어도 관중석에서는 홈팀과 원정팀이 뒤바뀐 것처럼 보였다. 점잖게 경기를 지켜본 300여명의 강릉시민들 사이에서 다국적 서포터스의 존재감은 도드라졌다. 일부 관람객은 경기 자체보다 이들의 응원 모습이 더 신기한 듯 지켜 봤고, 한 중년 남성은 서포터스와 얘기를 나누던 기자에게 다가와 "왜 이렇게 시끄럽냐"며 항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축구장에서 영화관의 관람 매너를 강요할 수는 없는 일. 찰리 로빈슨(38ㆍ영국)씨가 부르는 나팔 소리와 서포터들의 열렬한 함성 덕에 경기는 더 흥미진진했고, 강릉종합운동장도 제법 축구장다웠다.

열띤 응원에도 불구, 잔디밭 위의 상황은 부산 서포터스의 바람대로 풀리지 않았다. 리그 최하위(10위) 부산은 시종일관 리그 선두 강릉의 매서운 공격력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몇 차례 역습과 세트피스 기회가 모두 무산되면서 결국 부산은 한 골도 기록하지 못한 채 전반 41분, 후반 24분, 후반 38분 잇달아 세 골을 허용했다.

점수차가 벌어질수록 부산 서포터스의 응원 소리는 되레 커졌다. 에이드리언 로드(29ㆍ영국)씨는 "부산은 지고 있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팀이다. 경기 막판까지 열심히 뛰면서 골을 넣는 경우가 많아 '트랜스포트 타임'(부산교통공사의 영문 이름을 빌린 표현)이라는 용어까지 있다"며 만회골을 기대했다.

결국 '트랜스포트 타임'은 없었고 부산은 0대 3으로 완패했지만, 서포터들은 퇴장하는 선수들에게 열광적인 기립박수를 보냈다. 서포터들이 경기 내내 훌륭한 매너를 보여준 점도 인상적이었다. 경기 시작 직전 애국가가 연주될 때는 한국인 관객들과 같이 일어나서 경의를 표했고, 하프타임 때 상대팀 선수가 상을 받자 아낌없이 큰 박수를 보내줬다. 경기가 끝나자 10여분 동안 응원석 주변을 말끔하게 정리하면서 단 한 조각의 쓰레기도 남기지 않았다.

이날 강릉에는 봄비 치고는 제법 많은 27㎜의 비가 내렸다. 저녁엔 눈이 내릴 것이란 예보가 나왔다. 부산 서포터들은 그 궂은 날씨를 뚫고 400㎞를 달려 강릉까지 원정 응원을 왔다. 이날 원정을 위해 서포터들은 18년 된 그레이스 승합차를 빌리고, 승합차의 앞뒤로 부산교통공사 축구팀 응원 플래카드를 붙였다. 승합차 옆면에는 이들이 영웅처럼 떠받드는 박상인(61) 부산 감독의 사진을 붙였다. 경기 직후 박 감독이 서포터스 승합차로 직접 찾아와 서포터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고마움을 전한 것도 이들의 이런 열정에 대한 작은 보답이었을 것이다.

로빈슨씨는 "부산 경기는 모두 보러 가고 원정경기도 절반 정도는 응원을 간다"며 "날씨 때문에 원정 경기를 포기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한국인 서포터스 김수현(33)씨는 "외국인 친구들이 이렇게 열심히 응원을 하는데 한국 사람들이 내셔널리그 존재도 모른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 같다"며 "이 친구들이 자기 돈, 자기 시간 써 가며 이렇게 응원해 주는 모습에 큰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내가 만약 크고 강한 팀을 응원했더라면, 나는 그 구단의 수많은 고객 중 한 명이었을 거예요. 그러나 이 작은 팀에서 나는 팀의 일원이자 가족이 될 수 있었어요." 고향 영국에서 6부리그 팀 서포터 활동을 했던 로드씨가 굳이 이역만리 3부리그 축구팀의 경기장을 날마다 찾아오는 이유다.

강릉=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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