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화사하다. 길가 화분에 흙을 가는 작업을 엊그제 본 것 같은데 요술처럼 하룻밤 사이 꽃들이 가득하다. 무딘 눈에도 봄을 넘치게 느낄 수 있는 꽃들이 하루를 행복하게 해준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빈 화분에 담을 꽃을 샀다. 방에 돌아와 화분에 담으니 순식간에 봄이 방에 가득하다. 행복이 별 건가. 고작 2,000원에 이렇게 봄을 담뿍 누릴 수 있으니 이만한 행복이 따로 없다.
꽃을 고를 때 내가 가진 화분부터 가늠했다. 아무리 아름다운 꽃과 나무인들 그걸 담을 그릇이 모자라면 그 식물들에 대한 도리가 아니고, 쓸데없이 넘치는 그릇이면 혹여 심어질 꽃이나 나무들이 옹색하고 초라해지니 그 또한 예의가 아니다. 담을 그릇과 담길 내용이 서로를 적당하게 품을 때 둘은 서로 제 값을 누린다. 삶도 사람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태연하게 세금을 탈루하거나 연체하면서도 세금 걷어야 할 관직의 가장 높은 자리를 덥석 받아들이거나 그 부서에 관한 지식이나 관리 능력이 없으면서도 줄 잘 댄 덕에 장관직을 탐하는 이들은 이미 그 시작부터 일반시민에게 절망감과 모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자기 그릇을 재지 못한 까닭이다. 화분과 꽃의 크기가 맞지 않으면 꼴사납다는 것을 모르는 처사다. 꽃이나 나무 탓만일까? 문제는 그 관계를 가늠하고 재고 따지지 못한 채 지갑에서 돈만 치르면 된다고 결정한 구매자의 협량함이다.
해미에 내려와 생활하면서 누리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아침 일찍 서산 아라메길의 한 구간인 읍성에서 개심사로 넘어가는 산길을 오르는 일이다. 길을 나서며 주머니에 작은 수첩 하나를 챙긴다. 천천히 걷다보면 엉킨 생각을 풀고 때론 갑자기 떠오르는 영감이나 좋은 문장을 수첩에 얼른 적을 수 있다. 오후 책 읽기에 지치거나 글 쓰는 일이 살짝 지겨워지면 읍성을 한 바퀴 천천히 걷는다. 그 때에도 수첩은 함께 걷는다. 솔밭에 앉아 숨을 고르거나 관아 객사 툇마루에 앉아 봄 햇살을 누리면서 수첩에 생각을 적는다. 방에 돌아와서 혹은 한참 뒤에 그 수첩을 들춰보면서 덜어낼 생각은 지워버리고 키워야 할 묘목이다 싶으면 다른 묘판에 옮겨 심는다. 수첩은 분명 내가 잊거나 잃기 쉬운 생각을 담기에는 좋은 도구이다. 그러나 아무리 거기에 빼곡하게 담은들 그 생각을 키워내고 걸러내지 않으면 마구 갈겨쓴 글자들의 보관함일 뿐이다.
내 수첩은 내가 읽은 책들과 써야 할 글들을 위한 용도이면서 동시에 내 삶을 비춰보는 작은 거울의 역할에만 머문다. 그 이상의 역할은 그 수첩의 몫도 아니거니와 맞는 크기의 그릇도 아니다. 내게 수첩의 몫은 거기까지 뿐이다. 거기에 세상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세상의 일부분과 만나서 떠오르는 작은 생각을 짧은 순간에, 잊지 않기 위해 담아두는 화분일 뿐이다. 그런데 수첩이 그 이상의 몫을 탐하거나 내가 거기에 의존하면 대롱으로 하늘을 보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뿐이다.
어느 수첩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다. 수첩이 제 이상의 몫을 요구하지는 않을 터, 결국은 수첩 주인의 용량과 혜안의 부족에 대해 입대는 것이리라. 사물이건 사람이건 제 몫 이상을 탐하거나 착각하면 엉망이 된다. 제 몸 검댕이 묻은 것은 보지 못하고 준다고 덥석 무는 것도 꼴사납거니와 부족한 용량의 수첩을 세상만사 모두 해결하는 만능 창고라 여기는 이의 협량함도 보기 애처롭다.
계절이 바뀌면 새 옷을 입는다. 자연이 그걸 보여준다. 때가 되면 그에 맞는 새로움으로 탈바꿈하라고 자연이 가르친다. 그것이 조화의 삶이고 진짜 질서의 힘이다. 책상 위 작은 화분에 담겨진 봄꽃이, 산책길 동반자인 수첩이 내게 그런 겸허함을 깨운다. 방 가득 채운 봄의 향훈에 행복해하는 만큼이 내 행복의 용량이다. 안분지족. 그거면 됐다 싶다. 기특하게 남은 옛 골목길 모서리를 끼고 돌아 꺾여 들어오는 봄바람에 나는 걸음을 멈춘다. 외진 골목이 아니다. 길은 사방으로 이어졌고 바람은 그 길들이 오가는 통로임을 알려준다. 눈물 날 만큼 행복하다. 그런 봄이다. 새 수첩 하나 장만해야겠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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