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설명한 책이 사전이다. 말의 쓰임을 이해할 수 없을 때 펴는 책이 사전이다. 저마다의 의도로 말을 비틀고 꼬아서 서로 알아들을 수 없을 때, 그래서 말이 말 같지 않을 때 판가름의 기준이 되는 책이 사전이다. 요컨대 사전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필요가 있어서' 보는 책이다.
인문학 분야의 책을 쓰고 번역하는 일이 생업인 남경태씨의 은 그래서 독특한 사전이다. 우선 크기. 가로 12.8㎝에 세로 18.8㎝, 두께는 1㎝가 조금 넘는다. 이 정도 콤팩트한 사이즈에 넣으려면 감나무 접붙이기 사전이라든가 청계천 민물고기 사전 정도의 내용이 적당할 것이다. 그런데 아우르는 범주가 무려 '개념'이다.
이 책에 실린 단 하나의 개념, 예컨대 '이성'(308~311쪽)만 하더라도, 본격적인 철학 사전이라면 이 책 분량의 몇 배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실질적 참조를 위한 도구서로서는 적절치 않을 수 있다. 객관적인 서술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보기에도 애매한 데가 있다. 하지만 표제어가 가나다 순으로 가지런히 배열돼 있는, 사전이다.
남씨는 왜 이런 형태의 책을 썼을까. 책 머리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을 그런 방대하고 엄정한 사전에 비할 생각일랑 애초에 없다. 실은 지금 그런 고전 급의 사전을 펴내는 게 과연 의미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대신 이 책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종횡무진 초원을 누비듯이 한 개인이 지적 세계 속에서 좌충우돌하면서 겪고 부딪힌 개념들을 자신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지은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는 스스로 그 개념어에 관한 또 다른 시안을 구성해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울 것이다."
말마따나 이 책은, 남씨가 개인적 관점에서 개념들이 지닌 의미를 자신의 이미지로 포착해낸 모자이크화다. 그래서 이 책에 실린 설명들은 사전적 정의와 거리가 있다. 각각의 개념이 지닌 이미지는 페이지를 건너 뛰며 서로 대가리와 꼬리가 겹쳐 있어서, 'ㄱ'이 끝나면 'ㄴ'이 시작될 수밖에 없는 사전인데도 흐름을 가진 책으로 읽힌다. 사전이라는 카테고리에서 기대하지 않는 몫(재미와 교양)을 이 책이 감당하고 있다는 얘기다.
소싯적 두꺼운 철학개론서에서 마주쳐 낯설어 했던 개념들, '불온서적'에서 튀어나와 괴롭혔던 사회과학 개념들이 이 사전 속에 낱말 퍼즐 맞추기의 조각처럼 모여 있다. 그것들이 남씨의 독특한 시선과 입말로 버무려져 무척 흥미롭게 다가온다. 예컨대 '민족주의'.(153~156쪽)
"(유럽의)이 대분열기는 17세기 초의 30년전쟁에서 20세기 중반의 제2차 세계대전까지 300여년 동안 지속되는데, 이 기간이 대체로 민족주의 시대에 해당한다… 국기에 대한 맹세에서 민족주의가 얼마나 왜곡되어 왔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독재 체제에 반대하는 세력도 민족주의를 슬로건으로 채택한 특이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상은 이 책이 '다시 읽고 싶은 책'인 이유다. 그런데 가끔은 '다시 읽게 되는' 책이 된다.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필요가 있어서 이 책을 들춰보는데, 이 오롯이 사전 몫을 하는 때다. 첫머리에 썼지만, 서로 말을 비틀고 목 졸라 말이 좀체 말 같지 않아 들릴 때다. 이를테면 '좌익/우익'은, 이 사전엔 이렇게 나온다.
"좌익/우익이라는 명칭 자체는 정치적 성향에서 나온 게 아니다. 마침 국민공회에서 지롱드당은 오른쪽에 있는 좌석에 앉았고, 자코뱅당은 왼쪽에 앉았다… 그런데 이미 박물관에 들어갔어야 할 이데올로기가 유독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존재하며, 특히 선거 시기에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나는 법이다."(352~354쪽)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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