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는 무엇일까. 안톤 체호프(1860~1904)의 희곡 '세 자매'에 등장하는 중년의 군인 베르쉬닌은 "행복이란 우리 옆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갈망 속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삶이든 행복이든 존재로 받아들일지, 인식으로 받아들일지는 녹록하지 않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고주망태 60대 군의관 체부틔킨의 말처럼.
러시아 작가 체호프의 희곡 '세 자매'를 러시아의 거장 연출가 레프 도진과 그가 이끄는 말리 드라마 극장이 10일 서울 LG아트센터 무대 위로 올렸다. 12일까지 열린다. 이상과 현실, 희망과 좌절, 희극과 비극, 실체와 허상이 씨실과 날실로 엮인 작품이다. 도진과 배우들은 극적인 사건의 부재 속에 인물들의 내적 흐름과 일상적이고 관념적인 대화를 동력으로 3시간을 끌고 갔다.
세 자매 올가, 마샤, 이리나는 11년 전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 지방 소도시로 옮겨 와 권태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1년 전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엔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이 있는 모스크바로 돌아갈 생각뿐이다. 군인들과 시답잖은 대화로 소일하는 세 자매의 삶은 그로부터 4년이 지나도 별 변함이 없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사랑을 꿈꿔 보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무대는 단순하다. 현관문과 9개의 창이 있는 2층 집과 긴 식탁, 의자가 전부다. 인물들은 대부분 집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막이 끝날 때마다 집 세트가 무대 앞으로 다가와 관객들과 인물들의 숨통을 조인다. 불이 꺼진 집은 유령의 눈처럼 공허해 보인다. 의상은 안드레이의 아내 나타샤를 제외하면 모두 무채색에 가까운 생기 없는 채도의 옷이 대부분이다.
극이 끝날 무렵 세 자매의 집을 드나들던 군인들이 하나 둘 떠나간다. 권태와 좌절의 끝에서 맏언니 올가는 동생에게 말한다.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살아야 해. 조금만 있으면, 무엇 때문에 우리가 살고, 왜 고통을 당하는지 알게 될 것 같아. 그걸 알 수 있다면, 그걸 알 수 있다면."
레프 도진의 연출은 100년 전 러시아의 현실이 21세기 현재의 한국과 대화하도록 한다. 무대 아래로 내려와 객석 복도를 좌우로 오가며 연기하는 배우들 덕에 관객은 자연스레 극 속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말리 극장 단원들의 연기는 정밀하고 섬세하다. 삶의 의욕이 전혀 없어 보이는 체호프의 인물들이 실제론 불타는 욕망과 극심한 동요를 끌어 안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증명한다. 극이 끝날 때 도진과 체호프는 올가의 입을 통해 묵직하게 질문을 던진다.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삶의 미스터리한 이유를. 3회 공연 모두 전석 매진됐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