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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한칸에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둘러두고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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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한칸에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둘러두고 보리라

입력
2013.04.1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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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은자의 나라다. 옛 선비들은 나서서 강산을 경영하는 일 못지않게 물러서서 몸과 마음을 닦는 일을 가치 있게 여겼다. 그것은 숨어서 경운조월(耕雲釣月)하는 탈속이기도 했지만, 섞여들 수 없는 세월을 버텨내는 생존의 방편이기도 했다. 그들이 심신을 담던 그릇인 원림(園林)엔 그래서 아정한 기품이 서려있다. 조선 사대부의 정원에선 헤픈 감상을 멈추게 된다. 대신 호흡이 깊어진다. 여기저기 꽃망울 터지는 소리가 왠지 버성겨, 선비의 뜰로 조용히 봄 산책을 다녀왔다. 길은 멀리 남도의 아랫자락으로 잡았다.

진도 운림산방

운림산방은 조선 말 문인화의 대가였던 소치 허련(1809~1892)이 말년에 화실 겸 집으로 터를 잡은 곳이다. 이후 4대에 걸친 후손이 이곳에서 남종화의 큰 산맥을 이뤘다. 비교적 유명한 곳이니 사전에 나오는 얘기는 이걸로 줄이자.

딱따구리인지 크낙새인지 나무 쪼는 소리가 첨찰산 속에서 작지만 맑게 울렸다. 산의 동쪽 능선으로 해가 오르기 전에 운림산방을 찾아간 첫째 기쁨은 입장료 2,000원을 아꼈다는 것이고, 둘째는 오랜만에 나무 쪼는 산새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진도는 목포에서도 한참을 더 남쪽으로 차를 타고 가야 되는 땅이다. 외진 만큼 산도 공기도 깨끗하다. 봄철 이곳에선 눈으로 보는 풍경만큼 귀와 피부에 와 닿는 풍경이 맑다.

운림산방을 찍은 사진은 흔히 붉은 색감에 싸여 있다. 연못의 홍련과 못 가운데 뜬 섬에 휘어진 배롱나무가 여름이면 붉은 꽃을 낭자하게 피워내기 때문이다. 지금은 목련과 자목련, 회양목 등이 만개해 있다. 채도는 낮지만 명도가 높은 꽃들. 그래서 멀리서 보면 기와지붕이 환한 부케를 앉고 있는 것 같다. ●목포에서 2번 국도를 타고 영암 쪽으로 가다가 대불산단에서 남쪽으로 꺾어 영암방조제, 금호방조제를 넘어 계속 남쪽으로 가면 된다. 매주 토요일 미술품 경매 시장이 열린다. (061)287-5206

화순 임대정 원림

전라남도 기념물이던 임대정 원림은 꼭 1년 전 국가 명승으로 승격됐다. 그럼에도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다. 풍광에 비해 무척 고즈넉하다. 이곳에 처음 정원을 만든 건 16세기 말 문인 남언기다. 그는 생원시에 합격했지만 벼슬을 하지 않고 이곳에 정자를 짓고 평생 자연과 벗하며 살았다. 이후 황폐해졌다가 19세기 병조참판까지 지낸 민주현이 지금의 정자(임대정)와 원림을 조성했다. 연못이 넓고, 붙어선 작은 언덕 위에 정자가 얹혀 있다. 정자엔 임대정이라는 현판과 원래 이름인 수륜헌이라는 현판이 함께 붙어 있다.

허리 굽은 늙은 벚나무 몇 그루가 바닥 가득 꽃잎을 떨구고도 아직 몇 포대를 이고 있었다. 그 아래 연못 방죽이 헐려서 수리 중이었는데 인부들의 표정이 한없이 느긋했다. 그 게으름을 덮을 만큼 원림의 봄빛이 넉넉했다. 연못 사이로 길이 좁게 나 있고, 길 끝 조금 둔덕진 자리에 정자가 있다. 정자 툇마루에 앉으면 사평천의 물길과 화순의 너른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화순에서 벌교 가는 15번 국도와 822번 지방도가 만나는 곳에 화순군 남면사무소가 있다. 앞 교량을 건너서 오른쪽으로 꺾어 150m 정도 가면 닿을 수 있다. 화순군 문화관광과 (061)379-3514

담양 소쇄원

소쇄원은 조선 별서정원의 으뜸으로 꼽히는 곳이다. 별서(別墅)란 본래 살림집과 머지않은 곳에 지은 별채를 뜻한다. 번잡한 세사를 벗어나 은일하고자 만든 정원이다. 소쇄원의 조성 내력 또한 잘 알려져 있으니 생략한다. 다만 열일곱 어린 나이에 세상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가 만들었다는 사실만 상기하자.

매표소 지나 걷다가 가장 먼저 마주친 것은 대나무를 스치는 바람 소리였다. 키 큰 대숲이 드리우는 녹색의 그늘과 바람 소리는 마치 외부 세계를 차단하는 막 같았다. 스무살도 안 돼 뜻을 접어야 했던 이가 꿈꾼 이상향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으나, 그의 상심은 오백년이 지난 지금 조선 정원의 이상향으로 남았다. 녹색 그늘이 끝나는 곳에 무릉도원의 풍경이 펼쳐진다.

자그마한 계곡 위에 광풍각, 제월당 등의 건물이 절묘하게 들어앉아 있다. 청맹과니의 눈으로 봐도 조선 정원의 멋이 무엇인지, 자연과 인공의 어울림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모범이다. 수십편의 옛 노래로 이뤄진 시경(詩景)이기도 하다. ●호남고속도로 동광주IC에서 나와 887번 지방도를 타고 간다. 가사문학관이 먼저 나오고 250m 정도 더 가면 소쇄원이다. 입장료 1,000원을 받는다. 연중무휴 (061)382-1071

담양 명옥헌

명옥헌 원림은 마을 안에 있지만 깊숙한 산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정원이다. 마을 들어서는 길에 '아, 원림만 남았고 건물은 사竄낢립? 하는 생각을 했다. 왕버들 고목이 늘어선 저수지가 그만큼 운치 있었다. 하지만 명옥헌은 조금 더 가서 나왔다. 안내판을 지나니 세로로 길쭉한 연못만 보였다. 배롱나무가 줄지어선 그 연못 너머 명옥헌의 지붕이 보였다.

기록에 따르면 명옥헌은 한림원 기주관을 지낸 오희도의 넷째 아들이 지었다. 원림이 있는 후산마을은 오희도의 외가 마을이었는데, 그는 광해군 치하의 어지러운 세상을 멀리하고 이곳에 조그만 서재를 짓고 살았다. 인조반정 후 그는 벼슬길에 나갔지만 1년도 못 돼 세상을 떴다. 명옥헌은 오희도의 아들이 그를 그리워하며 지은 집이다.

명옥(鳴玉), 구슬이 굴러가는 소리라는 이름을 단 정자 툇마루에 올랐다. 지금도 누가 쓰는지, 방도 마루도 깨끗이 닦여 있다. 문을 열고 원림을 내다봤다. 깨끗하고 은은하고 담박한 풍경이 문설주를 넘어 들어왔다. 조선 선비가 풍긴 멋이,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호남고속도로 창평IC에서 나와 60번 지방도를 타고 2㎞ 정도 가면 후산마을 입구를 만난다. 주민에게 폐가 될 수 있으니 초입에 새로 생긴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 들어가야 한다. 담양군 관광레저과 (061)380-3150

진도·화순·담양=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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