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라이프'의 창안자와 도보여행가가 느리게 여행하며, 느리게 사는 사람들을 만났다. 문화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쓰지 신이치(61) 일본 메이지가쿠인대 국제학부 교수와 여행작가 김남희(42)씨. 2007년 피스보트에 동승하며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이 부탄을 시작으로 서로에게 소개하고 싶은 자기 나라의 '저속(低速)의 공간들'을 함께 여행했다. 일본 홋카이도, 나라, 한국의 강원도, 안동, 지리산, 제주도…. 느려서 더 충만하고, 느려서 더 행복한 삶을 세상에 증언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두 사람이 여행 후 각자 쓴 글을 모아 (문학동네 발행)을 냈다. 출간에 맞춰 한국을 찾은 쓰지 교수와 김씨를 10일 서울 부암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어 중 하나가 '빨리빨리'다. 일본도 한국도 삶의 속도에 관한한 둘째 가라면 서러운 나라들인데, 이런 곳에서 느리게 사는 삶을 찾기가 어렵지 않았나.
쓰지: 처음 함께 여행했던 부탄은 국민총행복(GNH)이라는 지표를 만들어 경제적 부가 행복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흥미로운 국가다. 부탄이 보여준 '느린 성장'의 가치를 한일 양국에서 찾아내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표였다.
-부탄의 복장 규제를 놓고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이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택의 자유'라는 건 기껏해야 자본이 제시한 몇몇 옵션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소비의 자유 정도라고 했는데.
쓰지: 나는 자유란 말을 들으면 슬퍼진다. 자유라는 말만큼 왜곡된 말도 없기 때문이다. 자유무역,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본래 교역이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자유로운 행위이다. 하지만 자유무역은 세계 격차를 만들고, 환경을 파괴하고,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결국 인간이 미래세대의 것까지 독점하려는 자유인 것이다. 우리는 자유롭게 선택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김: 나는 내가 의지대로 선택할 자유가 있는 삶을 산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논쟁을 통해 까마득해졌다.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 사회에서는 아주 모순적인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택의 자유란 결국 소비의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느리게 살기가 권고하는 것은 '뺄셈의 삶'이지만 현대인들은 오히려 물질적 욕망에 더해 시간적 여유까지 갖고 싶어하는 '덧셈의 욕망'을 가진 듯하다. 부탄인처럼 살기는 싫지만 부탄인들의 여유는 원하는 것이다. 그런 덧셈의 욕망으로서 '슬로 담론'이 소비되는 것 아닌가 하는 혐의도 드는데.
쓰지: 슬로라이프는 저 멀리 어딘가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삶을 살더라도 남의 시간이 아닌 내 시간을 살면 슬로라이프인 것이다. 해야 할 많은 일이 있더라도 슬로라이프를 살아갈 수가 있다. 슬로라이프는 할 일이 없는, 지루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풀(full)로 충실한 삶의 방식이다. 본래 우리가 살아가는 에너지는 기쁨이다. 그런데 지금은 공포가 그 에너지가 되고 있다. 패스트라이프에서 슬로라이프로의 전환은 공포에서 안심으로의 전환이다. 저 먼 곳의 슬로라이프를 동경하며 산다는 건 굉장히 슬픈 일이다. 인생은 언제나 지금 현재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지금 일에서 보람과 기쁨을 느낀다면 자기의 시간, 슬로라이프를 사는 것이다.
-'병은 한 사람이 열심히 살아온 증거'라거나 '분발하지 않는다는 것'의 장점을 열거한 구절들이 참 좋았다.
김: 홋카이도에 정신질환을 앓는 분들이 약함을 유대의 고리로 삼아 모여 사는 '베델의 집'이라는 곳이 있다. 모두 거기서 듣고 배운 것들이다. 우리는 지나친 긍정의 힘으로 스스로를 피로한 삶으로 몰아간다. 실패했을 때 괜찮다고 말하는 대신 '더 노력해야 해, 최선을 다하면 할 수 있어'라고 스스로를 가혹하게 다그친다. 베델의 집은 이것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걸 알려주는 경종이다.
-기성세대는 그래도 '고속사회'의 과실을 따먹었다. 반면 젊은이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속도에 휩쓸려 살았으면서도 지금은 '잉여'의 처지에 내몰렸다.
쓰지: 기성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사과하고 싶다. 많은 젊은이들이 상처받고 있다. 하지만 상처 받음으로써 그들에게는 우리 세대에는 없는 감수성이 있다. 더 깊은 지성, 감성, 예술성이 이들에게서 나오고 있다. 이건 일본만의 얘기가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지금 사회의 주류 시스템이 거짓말, 커다란 사기라는 걸 알아가고 여기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응원하고 싶다.
김: 그래서 이 책을 젊은이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이 책이 시스템 밖으로 나와도 괜찮구나, 남들 방향대로, 속도대로 살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들에게 안심을 줬으면 좋겠다. 젊은이들이 우리가 만든 세계 속에서 살아남으려 애쓰지 말고, 이 실패한 세계 말고 더 멋지고 근사하고 따뜻한 세계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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