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고 부질없는 질문을 하나 하자. 새로운 문물이 이입되고 상업이 발달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던 조선 후기. 당시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읽고 제대로 대처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보다 먼저 근대화를 이룰 수도 있지 않았을까? 동북아지역에서의 균형자 지위도 확보하고…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대신 말이다.
새삼 정조대왕과 그의 못 다한 꿈이 아쉬워지는 부분이다. 대왕은 정약용 등 새로운 비전을 지닌 인물들을 키우고, 이들과 함께 나라를 바꿔보자고 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반대세력의 저항으로 늘 어려움에 부닥쳐야 했다. 그나마 어렵사리 추진한 개혁들조차 대왕이 죽은 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이후 이어진 세도정치, 정치는 오로지 권력 자체가 목적인 자들에 의해 장악 되었다. 이 쪽 저 쪽 할 것 없이 세상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또 그 권력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는 난적들이었다. 결국 이들에 의해 정치는 목적과 방향을 잃었고, 나라는 갈가리 찢겨졌다. 식민지와 분단의 역사는 바로 거기서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의 형국이 그 때를 닮았다면 과한 이야기일까. 먼저 세상을 보자. 넓고 깊은 변화가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신자유주의 질서 아래 시장과 자본이 과도하게 성장하고 있다. 많은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또 속도를 더해 가는 기술혁신은 시장 구조와 자본의 흐름, 그리고 소비패턴과 문화까지 바꾸고 있다. 여기에 고용 없는 성장과 가족의 해체 등 사회의 근본을 바꿀 변화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내부의 구조적 문제도 만만치 않다. 통계수치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의 양극화, 낮은 수준의 사회안전망, 높은 자영업자 비율, 비효율적 인력자본 육성체계, 후진적 금융관행, 노동시장의 분절적 구조, 불공정한 시장질서, 낮은 조세부담률, 남북 간의 대치 등 발목을 잡고 있는 문제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정치권은 이러한 문제들에 잘 대처하고 있을까. 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다. 우리의 정치권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대로 된 의제를 설정할 능력도, 올바른 대안을 마련하고 합의를 이끌어 낼 능력도 상실하고 있다.
지난 대선 때 보인 정책담론의 수준은 그 결정판이었다. 사실 애초부터 미래비전이나 정책은 뒷전이었다. 처음부터 선거구도에 대한 이야기와 전술적 차원의 이야기들이 선거를 주도했다. 어떻게 하면 야권 통합과 후보단일화를 이룰 것인가, 또 어떻게 하면 이를 막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상대에 대한 분노를 유발하고, 또 어떻게 하면 이를 피해갈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더 큰 이슈였다.
그 결과 정책담론의 수준은 저급하기 짝이 없었다. 양극화 문제는 어설픈 복지 담론으로 땜질했고, 고용 없는 성장의 문제는 일자리 나누기와 사회적 일자리 정도로 메웠다. 신자유주의 문제에 대해서도 한 쪽은 무대책에 가까웠고, 다른 한 쪽은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 개방반대의 구호만 외쳤다. 새로운 성장 모델을 찾는 일도 그랬다. 분배정책이 마치 유일한 성장정책인 것처럼 제시하는가 하면 '창조경제' 운운하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를 단어들만 나열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다. 정치권의 관심은 오로지 어떻게 해서 이길 수 있었고, 또 어떻게 해서 다 이긴 선거를 졌느냐 따위에 있다. 권력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조선후기의 난적들과 뭐가 다른가.
권력을 잡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기지 말라는 이야기도 아니다. 권력을 잡고자 하는 것이 정치인데 어떻게 권력을 잊어라 할 수 있겠나. 그러나 정치가 이기면 이긴 그 자체로 만족하고 끝나는 스포츠 게임은 아니지 않은가. 이기면 이기는 대로, 권력을 잡으면 권력을 잡는 대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어려운 시기이다. 나라가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 지금 올바른 질문을 던지지 못하면 훗날 '난적'이 된다. 대통령이건 국회의원이건 그렇다. 정치를 하고자 나섰으면 제대로 나라 걱정하는 흉내라도 내어야 한다.
김병준 국민대 행정정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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