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안톤 체호프(1860~1904)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늘 그와 대화하고 있기 때문이죠. 예술을 창조하는 기쁨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존하는 러시아 최고의 연극연출가로 꼽히는 레프 도진(69)이 체호프 원작의 '세 자매'를 들고 한국을 찾았다. 도진이 1983년부터 30년째 이끌고 있는 말리 극장의 작품으로는 2010년 '바냐 아저씨' 이후 3년 만이고 총 네 번째 내한공연이다.
2001년 세르게이 칼레딘의 소설 를 각색한 '가우데아무스'가 국내 첫 공연된 이후 2006년 표도르 아브라모프 원작의 7시간 반짜리 대작 '형제자매들', 체호프 원작의 '바냐아저씨'가 한국 관객들과 만났다.
"한국 관객은 감수성이 풍부하고 공연에 대한 반응도 빨라서 어서 만나고 싶었다"고 말한 도진은 9일 기자간담회에서 10일부터 12일까지 세 차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되는 '세 자매'에 대해 "체호프의 작품 중에서도 굉장히 섬세하고 복잡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세 자매'는 체호프가 1900년에 집필해 이듬해 초연한 희곡으로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모스크바를 떠나 지방의 소도시에서 살게 된 세 자매와 주변 인물들의 사랑과 배신, 삶에 대한 희망과 좌절을 그린다. 도진은 "체호프의 작품 속 인물들이 나태하고 무기력하고 삶의 의욕이 없다는 선입견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깊은 내면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며 "그러한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고 말했다.
도진의 '세 자매'는 2010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시작으로 파리, 밀라노, 뉴욕 등지에서 공연됐다. 지난해 뉴욕 공연에 대해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도진의 연출은 놀라울 정도로 연약함과 담대함, 양식화된 표현주의가 우아하게 뒤섞여 있다"며 "대부분의 중요한 배역이 감정적으로 강렬하고 정밀하고 세밀한 연기를 보여준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극찬했다.
도진은 세계 연극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연출자 중 하나다. 유년 시절 연극 교육자였던 두브로빈이 연출가로 있던 레닌그라드 청년 관객의 극장에서 연극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고교 졸업 후 레닌그라드 연극원에 입학해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오랜 수제자였던 보리스 존을 사사했다.
1966년 첫 연출작인 투르게네프 원작의 '첫사랑'을 시작으로 다수의 작품을 연출하며 재능을 인정받았다. 1975년 객원 연출가로서 말리 극장과 인연을 맺은 뒤 1983년부터 상임 예술감독으로 극단을 이끌고 있다. 러시아에서 연극 분야 최고의 영예인 골든마스크 국립연극상을 세 차례나 수상했고, 러시아인 최초로 세계 연극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인 유럽연극상을 받았다.
도진은 "연극의 본질은 관객에게 인간의 내면을 발견하고 정신적이고 지적인 경험을 하게 만드는 데 있다"고 했다. 그는 좋은 연극을 '공감'에서 찾았다. "저는 연극을 통해서 관객이 느끼고 있는, 또는 감추고 있던 감정이나 문제를 다른 누군가도 똑같이 느끼고 공감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게 바로 연극의 핵심이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연출하는 말리 극장의 무대는 단순하면서도 묵직한 은유를 지닌 장치로 유명하다. 2010년 '바냐 아저씨'에선 공중에 걸린 건초더미가 등장인물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이번 작품에선 무대 뒤편에 있던 2층집이 차츰 앞으로 나와 무대와 인물들을 삼킨다. 도진은 "세 자매에게 집은 삶의 희망과도 같은데 집이 무대 앞으로 나온다는 것은 삶에서 희망이 사라지고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던 것이 남의 것이 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피터 브룩, 데클란 도넬란 등 세계 최고의 연출가들은 도진이 이끄는 말리 드라마 극장에 대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앙상블 극단"이라고 했다. 말리 극장이 극단인 동시에 학교, 가족과 같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연극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이폰, 인터넷, 이메일…. 우리는 가상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연극이 공연되는 극장이야말로 사람이 혼자 앉아서 자신의 내면을 느끼고 실시간으로 내 앞에서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와 마주할 수 있는 마지막 공간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화면을 통해선 사람의 온도와 영혼을 느낄 수 없어요. 연극은 결국 사람의 힘이죠." (02)2005-0114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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