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총리로 재임할 당시 추진한 개혁정책 대처리즘은 정부 기능을 대폭 축소하고 시장 자율화를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이 정책은 영국을 송두리째 바꾸면서 ‘영국병’을 고쳤다는 평가를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업자를 양산하고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대처는 1925년 링컨셔주 그랜샘의 식료품집 딸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1951년 남편 데니스 대처와 결혼한 그는 독학으로 사법시험을 준비해 28세 때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1959년에는 보수당 소속으로 런던 핀츨리 지역구 의원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1965년 에드워드 히스 보수당 정권이 들어선 뒤 주택장관, 연금장관, 재무장관 등의 요직을 거쳤으며 교육장관으로 있던 1970년에는 7~11세 취학아동에게 무상 지급되던 우유를 유상으로 전환했다가 ‘우유 도둑’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1976년에는 옛 소련의 억압적 정책을 강력히 비판해 소련 언론으로부터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975년 보수당 최초의 여성 당수가 된 대처는 감세와 법질서 회복을 공약으로 걸고 1979년 총선에서 승리, 영국은 물론 유럽 최초의 여성 총리로 등극했다.
그는 취임 후 국영사업 민영화와 노동조합 활동 규제 입법에 나섰다. 이후 금리 규제 중단, 주택 구입 보조 폐지, 고등교육 지원 폐지 등을 통해 예산을 대폭 삭감하고 경제를 시장에 맡기는 정책을 본격 추진했다. 그는 1980년 6월 인터뷰에서 자유시장과 자유경제를 옹호하며 “대안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발언은 신자유주의만이 진리라는 의미로 곧잘 인용된다. 그의 정책은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고 치솟던 물가를 낮췄다. 하지만 실업률을 올리고 양극화를 심화시켰다는 비판 또한 컸다. 1984년 174개 국영 탄광 중 20곳을 폐업하고 2만명의 탄광 노동자를 해고하자 전국적인 파업이 일어났다. 그러나 대처는 노조를 강경 진압하고 미리 확보한 석탄 재고를 공급하면서 힘겨루기에서 승리했다.
그는 강한 영국을 기치로 외교 정책을 펼쳤다. 아르헨티나가 1982년 영국령 포클랜드를 점령하자 대처는 외교적 해결 대신 군대 파병을 선택했다. 아르헨티나가 두 달 만에 물러나자 대처는 “대영제국의 영광이 되살아났다”고 기뻐했다.
대처는 1979년에 이어 1983년, 1987년 총선에서 잇달아 승리하며 세번이나 총리직을 연임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영국 경제가 다시 침체에 빠져들며 그의 집권도 위기에 빠졌다. 성장이 둔화하고 실업이 증가하자 대처식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민심을 잃은 대처는 1990년 보수당 당수 선거 과정에서 사임하면서 정계와 멀어졌다. 잠시 세계 각지에서 강연을 하고 기업과 대학에 적을 두었지만 2002년 뇌졸중을 겪은 뒤로는 대외 활동을 자제했다.
박우진기자 panoram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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