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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조선의 따로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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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조선의 따로 문화

입력
2013.04.0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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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국의 문화 특징 중 하나로 손꼽는 게 ‘밥상공동체’다. 한 상에서 온 식구가 모여 찌개그릇에 같이 숟가락을 담그는 습관을 말하는 것이다. 아주 오래된 식문화처럼 알고 있지만 사실은 오해다. 언제부터 한 상에서 밥을 먹게 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조선사람들은 모두가 따로 상을 받았다. 지금도 종가의 마루 천정에는 개다리 소반이 즐비하게 걸려 있는 걸 볼 수 있다. 지금이야 제사 때나 따로 상을 내지만 조선시대에는 일상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주부들이 참 불편했을 것 같다. 모든 반찬을 따로 따로 상에다 담아야 했으니 상차리기는 그렇다 치더라도 설거지 감은 얼마나 많았을 것인가. 그런데 왜 이런 불편한 따로 상차리기를 했을까? 조선집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조선집의 구조에서는 ‘따로 상차림’이 훨씬 쉬웠다는 걸 알 수 있다. 조선집은 단 차이가 꽤나 많다. 집에 들어가는 순서대로만 따져도 대문과 길이 한 자에서 심하면 세 자 정도까지 차이가 난다. 그리고 마당에 들어서면 거기서 기단까지 두 자 정도 차이가 나고, 기단에서 툇마루까지 한 자 좀 넘게 차이가 또 생긴다. 툇마루까지 이르면 차이가 같아지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창과 문이 모호한 조선집에는 다시 한 자 정도의 창턱이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부엌이다. 부엌은 아예 마당보다 낮다. 왜냐하면 구들을 데워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조선집의 바닥 차이를 상상하면서 주부들의 동선을 생각해 보자. 부엌에서 계단 한 두 단을 밟고 문의 문턱을 넘어 마당보다 약간 높은 부엌 쪽 기단으로 나온다. 그리고 거기서 기단에 올라선다. 기단에서 또 툇마루에 오르고, 문턱을 넘어 이윽고 방에 이르게 된다. 하인이 없으면 생각하기도 싫은 운동량이다. 이 복잡한 동선을 한 식구가 다 모여서 먹을 수 있는 큰 상을 가지고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두 사람이 들고 간다고 해도 서로 높낮이가 맞지 않아 그릇들이 흘러내리기 일쑤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간단한 것은 밥을 먹는 방에 큰 상을 펴두고 소반을 이용하여 거기에 음식을 담고 나르는 일일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소반에 담은 음식을 그대로 바닥에 놓고 먹는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은 소반을 그대로 바닥에 놓고 먹지도 않았고, 한 상 차림을 하지도 않았다. 조선사람들의 해결책은 소반에 다리를 다는 일이었다. 음식을 나르는데 쓰이는 소반에 다리를 달자, 소반이 그대로 상이 되었고(개다리 소반), 아예 거기에 한 사람의 상을 차린 것이다(따로 상차림). 이렇게 되면 소반에 있는 차림을 상으로 가져가는 번거로움이 줄어든다. 부엌에서 한 사람이 소반 하나를 들고 그 많은 들쑥날쑥을 넘어 방에 가져다 놓으면 상차림이 끝난다.

그러니까 조선집의 구조가 ‘따로 상차림’ 문화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제도와 규범이 집에 끼친 영향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부부가 따로 떨어져서 생활하는 ‘따로 방’ 문화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아내와 함께 자지 않았다. 지금이야 우리는 부부가 따로 방을 쓰면 뭔가 큰 일이 난 것으로 짐작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그것이 남우세스러운 것이었다. 이것을 남녀가 유별하다는 유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곤란하다. 조선시대의 남녀는 서로 하는 일이 분명히 갈라졌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안채에서, 주로 집안의 크고 작은 일들에 관여해야 했고, 남자는 사랑채에 머물면서 손님을 접대하고 문중 회의 같은 집밖의 일들에 관여했다. 그러니 자연히 서로 일하는 장소가 다르게 되었고, 그 장소를 아예 분리한 것이 그대로 ‘따로 방’ 문화가 되었던 것이다. 부부관계는 지금처럼 은밀한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는 어느 정도 공식적인 일이었다. 남편이 아내와 합방을 원하면 반드시 제 삼자(하인)를 통해 의사를 묻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안채에 자리를 봐라’는 것이다. 물론 아내가 원치 않으면 남편은 사랑채에서 그냥 잘 수밖에 없다. 안채와 사랑채를 사이에 두고 오갔을 이런 긴장을 읽어보는 것도 조선집을 살피는 맛 중에 하나다.

함성호 시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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