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26일 서울교대 종합문화회관. 강단에는 칠판도 백묵도 없었고 강연을 들으러 온 학생들도 빈손이었다. 강연자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 '무한도전'의 김태호PD. 동그란 안경에 밑단을 발목까지 접어 올린 청바지 차림의 패션은 연예인을 방불케 했다. "MBC 면접 볼 때 면접관은 어차피 여기서 떨어지면 다신 안 볼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다리도 꼬고 먼저 농담도 했죠. 솔직한 모습을 보여주니 내게 관심을 가지더군요." 그의 도발적인 면접 체험담에 500여 청중들은 금세 달아 올랐다. "어차피 그들도 회사에 필요한 사람을 뽑는 거죠. 그들 역시 여러분들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꼭 저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지만 대범함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도전캠프'라는 타이틀의 이날 강연은 자아를 찾고자 하는 청년들의 부흥회를 방불케 했다. 조진원(23)씨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꿈을 찾았고, 어떻게 성공했는지 궁금해서 강연장에 왔다. 꿈을 찾자는 게 요즘 트렌드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 의욕이 솟는다"고 말했다.
지난 달 28일 서울 장충동의 한 카페. 그룹 SES 출신인 유진씨의 '뷰티토크콘서트'가 열렸다. 카페 한 켠에는 클래식 피아노가 놓여 있고 맞은편에는 음료수와 빵을 제공하는 테이블이, 중앙에는 유진과 초대손님들이 화려한 무대에 앉아 있었다. 강연장이라기보다 파티장 같은 분위기였다. 청중들의 복장도 화려했다. 형광색 트렌치 코트에 빨간 스커트를 입거나 가죽 점퍼에 검은 청바지 차림, 화사한 분홍 드레스로 맵시를 한껏 드러낸 여성도 눈에 띄었다. 강연 내내 유진씨는 "사랑 받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여성은 아름다워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넷으로 참가 신청을 받은 이 강연의 입장권은 1시간도 안돼 마감됐다. 이날 강연에는 250여 명이 몰렸다. 이지연(가명ㆍ21)씨는 "어렵게 입장권을 확보했고, 와서도 추위에 떨며 3시간 넘게 기다렸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말했다.
소통의 공간인가 새로운 시장인가
대중 강연이 한국 사회의 뜨거운 문화적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학교 직장 공직사회 할 것 없이 '이 시대의 멘토'들의 강연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명사 강연을 정규 수업으로 개설한 대학도 적지 않다. 상명대의 '성공학특강'이나 한국해양대의 '월드비전'등이 그 예다. TV를 켜도 '강연 100도씨'(KBS) '지식나눔 콘서트'(SBS)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CBS) 등이 경쟁적으로 개설됐다.
강연 수요가 늘면서 강사를 섭외해 공급하는 전문업체만도 국내에 10여 곳이 성업 중이다. 이들 업계는 국내 강연 시장 규모를 연간 2조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기업 워크숍, 각종 재교육, 지방자치단체의 행사, 기업이 후원하는 이벤트 강연을 합산한 수치다. 대개는 기업이나 대학, 정부기관 등의 요청으로 힐링, 도전, 성공 등을 주제로 강연을 열지만, 강연기업이 설득의 비밀,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드는 법, 보컬 강연 등 강연 상품을 만들어 3만원에서 20만원 선의 참가비로 입장권을 판매하기도 한다. 업계가 스스로 새로운 강연 시장을 창출하기도 하는 셈이다.
중앙대의 TEDexCAU는 대학생들이 2011년 스스로 조직한 강연 컨퍼런스다. 창립멤버인 윤지은(21)양은 "지금까지 총 5번의 강연을 열었는데 매년 행사 지원자가 증가하고 있고, 강연자 섭외도 쉬워졌다"며 "강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점차 보편화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강연 열기를 달군 데는 미국의 지식강연 컨퍼런스 TED의 영향이 크다. 빌 클린턴, 록 그룹 U2의 보노, 제인 구달 같은 명사부터 태양열을 이용해 사자 쫓는 전구를 발명한 마사이족 열세 살 소년 리차드 투레레와 같은 평범하지만 세상을 바꾼 사람들이 강연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내용도 최신 컴퓨터 기술, 해저 탐사, 아이티에서 빈곤과 싸우는 법 등 다양하고 흥미롭다. 지식과 아이디어가 더 이상 대학과 연구소 안에 머물지 않고 SNS 등 다양한 모바일 채널을 통해 세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대중 강연의 인기에 대해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유홍식 교수는 "강연장의 화려한 조명, 유명인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 강연자의 과장된 제스처 등 쇼(Show)적 요소가 가미된 데다 지식을 압축적으로 전달한다는 점도 인기를 끄는 요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화평론가 김갑수 씨는 "과거에는 기술이 중요했지만 상품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가 필요한 현대에는 소양과 지식이 필요하다. 이를 쌓기 위해 강연을 듣는다"고 말했다.
성공의 기술들, 힐링의 기술들
하지만 TED 강연과 한국 강연의 차이는 뚜렷하다. 유홍식 교수는 "TED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던 강연이 모든 사람에게 확대된 일종의 평생교육이다. 우리나라 강연은 지식이나 생각을 전달하는 사회공헌이 아니라 유명인들이 성공담을 말하는 일종의 인기몰이에 가깝다"고 말했다. 계원예대 인문교양克?서동진 교수는 한국 대중 강연이 기업 프로그램의 대중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기업들은 90년대 이후 영업과 서비스가 중요해지자 각종 강연 프로그램을 개설해 직원들의 정서적 능력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직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도입된 강연들이 대중에게 확대되고 있다. 실제 스타 강연자(김미경, 정덕희)들은 대부분 기업 강연으로 인기를 모았다"라고 말했다. 논문표절 사실이 드러나 최근 방송에서 하차한 TVN '스타강사쇼'의 강사 김미경씨가 방송에서 줄기차게 강조한 바는 "치열하게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는 한 강연에서 "꿈은 결핍이 이룬다. 이 인생 진리는 지난 5,000년간 바뀐 적이 없다. 누구나 25살이나 30살 이후 열심히 살면 자신이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어야 정상이다. 원하는 일이 있으면 새벽 4시30분에 일어나라. 그 때 일어나면 무슨 일이든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강연에 열광했다는 취업 준비생 김현수(가명ㆍ27)씨는 "스펙이 좋지 않아 취업을 못하고 있다. 지난해 김미경 쇼를 봤는데 억척스럽게 살아서 성공한 이야기가 가슴에 남았다. 그의 말에 모두 공감한 것은 아니지만 나태해지는 내게 채찍을 가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자기계발이 자기착취가 안 되려면
힐링과 자기계발을 앞세운 대중강연의 유행에 대한 비판도 뜨겁다. 김갑수 씨는 "김미경 씨는 강연에서 '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는 5공 때나 나왔던 퇴행적 구호다. 과거에는 개인이 연대해서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을 교정할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은 눈에 보이는 적이 없으니 오히려 개인들이 각자 노력해 부자가 되자고 한다. 강연은 결국 자기계발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다수 자기계발 강연자들은 부조리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의지를 심어주기보다 야들야들한 위로를 주거나 더 노력하라고 말한다는 점에서, 즉 구조적인 문제를 모두 개인의 문제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며 "가볍게 유희로 즐기면 상관없지만, 웃고 즐기는 사이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까지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서동진 교수는 "토크쇼나 강연 등은 미국 오프라윈프리 쇼처럼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친숙한 방식으로 전달한다. 사람들은 성공한 명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기도 숨겨진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을 멘토로 부른다. 독설이라도 진심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실 강연에서 말하는 자기계발이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 사람들의 능력이나 취향, 주어진 조건은 모두 다르다. 그럼에도 강연을 보고 어떻게든 기를 써서 자기를 끌어올리려 한다는 데서 자기계발은 일종의 자기 착취다"라고 말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