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정의 사람, 이야기] ‘첫 여성 치안정감’ 이금형 경찰대학장
잘난 척이 아니라 진짜 잘난 ‘언니들’을 보면 같은 여자라도, 아니 같은 여자여서 더 주눅이 든다. 삼신할매 덕 본 경우 말고 맨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온갖 역경을 이겨 낸 인생 스토리까지 더해지면 “아휴~ 난 그렇게 못 살아!”하며 괜한 어깃장도 놓게 된다.
이금형(55) 신임 경찰대학장이 딱 그렇다. 1977년 고졸 순경으로 첫 발을 디딘 그는 최근 경찰 창설 68년 만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치안정감에 올랐다. 치안정감은 경찰청장(치안총감) 바로 아래 계급으로 서울청장, 경기청장, 경찰대학장, 부산청장, 경찰청 차장 등 5명뿐이다. 순경 출신 치안정감도 그가 처음이라니, 대한민국 경찰사를 새로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도저’ 등 별명도 그렇고, 둘째를 가졌을 때 임신 사실을 숨긴 채 부패한 토막 변사체의 손목을 그러쥐고 지문을 채취했다거나 세 딸이 어렸을 때 ‘계모’라 불렸다는 등 익히 알려진 일화들에서도 ‘지독한 언니’의 모습이 도드라진다.
3일 경기 용인시 경찰대 학장실에서 만난 그에게 슬쩍 심술을 부려봤다. 존경스럽긴 한데 필부(匹婦)들이 롤 모델로 삼기엔 너무 버겁다고. “36년간 걸어온 길을 한번에 죽 꿰어 들으니 대단하다, 어떻게 저렇게 살아? 싶겠지만,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을 뿐이에요. 난관에 부딪쳤던 하루, 이 악물고 버텨낸 하루, 그런 날들 1만3,000여 일이 모여 여기까지 온 거죠. 길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하루하루 열심히 살자, 그러면 돼요.”
-될 사람이 됐다고들 하지만 여성 대통령 덕에 특혜 받았다는 평도 있을 법한데.
여성 대통령 시대라 기회가 왔을 순 있죠. 그동안 여성은 능력이 있어도 ‘유리천장’에 막혀 고위직 진출이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특혜라니, 말도 안 돼요. 제가 경무관 이상 간부들 통틀어 최장 근무자이고, 경찰관의 96%가 저처럼 순경 출신이에요. 지난 10여년 간 성ㆍ가정ㆍ학교 폭력과 생활안전 분야에서 커리어를 쌓았어요. 균형과 대통합 인사, 더 중요하게는 생활안전에 관한 요구가 높아진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인사라고 생각해요.
-9번의 승진 가운데 이번이 가장 기뻤나요?
가장 기뻤던 건 총경 됐을 때죠. ‘경찰의 꽃’이란 말도 있지만, 순경 때부터 우러러보던 경찰서장이 되니 정말 설??? 고위직에 오를수록 기쁨보다 책임감이 앞서요. 저 혼자 잘나서 100m 달리기로 여기에 뚝 떨어진 게 아니니까. ‘당신은 우리의 꿈과 희망’이라며 성원해 준 수많은 순경 출신들과 여경들, 저를 믿고 따라준 성ㆍ가정ㆍ학교 폭력 피해자들과 관련 단체 분들을 생각하면 정말 잘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더 커지죠.
승진 발표가 난 지난달 29일 신임 경찰청장 취임 축하연에서 그는 눈물을 보였다. “한마디 하라기에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면서 마이크를 잡았죠. ‘감사합니다. 제가 순경으로 들어와…’하는데 갑자기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아유, 나잇값도 못하고 창피하게….(웃음) 실종아동 부모들이나 폭력 피해자들을 만날 때 더러 눈물을 흘렸지만 경찰 되고 나서 내 일로 울어본 건 처음이에요.”
그의 어릴 적 꿈은 화가였다. 그러나 사업에 실패하고 5년간 암 투병하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 미대 진학을 포기하고 경찰이 됐다. “‘제복 입은 여경이 참 멋지다’던 아버지의 말씀, 경찰 간부였던 작은아버지의 영향이 컸지만, 5남1녀 중 셋째로 자라 왈가닥 같은 성격에도 잘 맞겠다 싶었죠. 돈 좀 벌면 그만두고 미대에 갈 생각이었어요.”
그는 충북도경에 있을 때 전경으로 군복무 중이던 남편을 만났다. “지금은 완전 무섭다고들 하지만 눈 코 입이 오밀조밀한 게 꽤 예뻤어요. 전경들이 관심을 보여도 눈길 한번 안 줬는데, 테니스 배우러 갔다가 멋지게 스매싱 하는 모습에 끌려서 그만….(웃음)” 그는 결혼하고 딸 셋을 낳고 난 뒤에야 꿈과 현실 사이에서의 오랜 방황을 끝냈다. “‘인생은 한 폭의 수채화’라는 여고 미술부 은사님의 말씀이 떠올랐어요. 수채화는 자꾸 덧칠하면 망쳐요. 그림 딱 끊고 경찰로서 내 인생의 그림을 제대로 그려보자고 결심했어요. 그래서 방통대 법학과에 진학했고, 내친 김에 동국대에서 석ㆍ박사 학위까지 받았죠.
-경찰 업무도 힘든데 애 셋 키우며 어떻게 공부를 했나요?
시어머님께서 거의 다 키우셨죠. 결혼 전 한 집에 살던 시누이들도 많이 도와줬고. 저는 순경으로 저 밑바닥부터 올라온 것 못지않게 아홉 명, 열 명이 좁은 집에서 버글거리며 살면서 시댁 식구들과의 그 얄궂은 인간관계를 잘 풀어온 것도 저의 경쟁력이라고 봐요. 며칠 전 한 간부한테 그랬어요. “여경이 어쩌니 저쩌니 하지 마. 당신들, 심신의 강인함에서 나랑 비교가 안 돼.”(웃음) 저는 항상 주어진 여건에서 방법을 찾는데, 공부도 마찬가지예요. 설거지 하거나 아침에 화장할 ?녹음기를 켜놓고 살았어요. 유통회사 다니는 남편이 일요일 근무하고 월요일 쉬는 바람에 ‘일요 과부’로 살았던 것, 첫째, 둘째가 과학고, 카이스트를 다녀 줄곧 기숙사 생활을 한 것도 제가 공부하기에 좋은 여건이 됐죠.
-아이들이 ‘엄마가 우리한테 해준 게 뭐 있냐’고 원망하진 않았나요?
그런 적도 있죠. 남편도 “집에서 살림 사는 마누라 하나 더 필요하다”고 툴툴대고.(웃음) “할머니가 힘들지, 엄마가 무슨 고생이냐”던 아이들이 요즘엔 “엄마 참 대단해” 그래요. 지들도 결혼해 살아보니 아는 거죠. 제가 힘들 때 주문처럼 쓰는 말이 있어요. “감상에 빠지지 말자. 뒤돌아 보지도 말자. 앞으로 전진!” 기술고시 봐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큰딸, 미국 유학중인 작은딸, 치의학전문대학원 다니는 막내도 이 말을 배워 써요. (스마트폰을 열어 보이며) 보세요. 카톡 가족방에서 서로 용기를 북돋워줄 때도 쓰곤 해요.
-경찰이 된 걸 후회한 적은 없어요?
후회보다는 고생하신 시어머님과 친정어머니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이 땅에서 여성들이 일을 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고, 대개는 양쪽 어머니들이잖아요. 시어머님은 어깨관절이 다 망가져 오늘 수술을 하는데, 어제 학장 취임하면서 관사로 옮겨 아직 병원에 가보지도 못했어요. 친정에는 1년에 한두 번 갈까 말까 하고. 퇴직하고 나면 두 분 모시고 자주 바깥 바람도 쐬고 맛난 것도 사드리고 싶은데, 그때까지 살아계실지….
지금이야 여성ㆍ청소년 관련 업무에서 최고의 베테랑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이런 일만 떠맡는 게 처음부터 달갑지는 않았다. “예전엔 변방 취급 받던 분야였으니까요. 지휘관으로 성장하려면 보직 경험이 중요한데, 인사과장, 감찰과장, 정보과장 이런 걸 써내고 안 시켜주더라고요.” 그는 이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2001년 경찰청 초대 여성정책실장 시절 초등생이 입고 있던 흰 운동복이 온통 피로 물들 만큼 잔혹하게 성폭행 당한 사건이 결정적 계기였다. “세 딸을 둔 엄마로서 너무 부끄러웠다”고 했다.
경찰청 여성청소년과장(2004), 생활안전국장(2010) 등을 거치며,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내 여성청소년과ㆍ계 신설, 성폭행 피해자 원스톱지원센터 구축, 관련 법ㆍ제도 강화를 주도했다. 인력과 예산을 확보하느라 기획재정부, 국회 등을 무좀 걸릴 정도로 땀나게 쫓아다니며 자식 뻘인 사무관들에게 머리 조아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2004년 성매매특별법 시행 당시 이른바 ‘성매매와의 전쟁’을 주도했고, 2006년 서울마포경찰서장 땐 연쇄 성폭행범 ‘마포 발바리’를 검거했다. 2011년 광주경찰청장에 부임해서는 영화 ‘도가니’를 통해 뒤늦게 알려져 전 국민을 분노하게 했던 광주인화학교 지적장애아동 성폭력 사건을 재수사해 14명을 형사 입건했다. 그는 지난해 말 경찰청 경무인사기획관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도 피해아동 진술과 트라우마 치료를 담당했던 신의진 소아정신과 전문의(현 새누리당 의원), 이명숙 변호사 등 전문가, 피해자대책위 관계자들과 카톡에 ‘도가니 방’을 만들어 수시로 연락을 하며 필요한 지원을 하고 있다.
-재수사팀과 함께 최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주는 ‘디딤돌’ 상을 받으셨죠.
2005년 원스톱지원센터 만든 걸로 이 상을 받았는데, 이번이 두 번째예요. ‘도가니’ 사건은 7년 전에 한번 무혐의를 받은 터라 다시 기소하기 힘들 거라고 봤어요. 처벌까지 못 가더라도 피해자들이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근거를 확보한다는 것이 1차 목표였어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데, 이 사건이 꼭 그랬어요. 전방위 수사와 지원 활동 덕에 장애아동 손발을 묶고 성폭행을 한 인화학교 전 행정실장이 1심에서 검찰 구형보다 높은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죠. 제가 서울로 온 뒤 항소심에서 무죄가 날 거라는 얘기가 떠돌아 난리가 났어요. 신 의원이 대선 투표일 1주일 전 열린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1시간도 넘게 증언을 했어요. 결국 8년으로 감형됐지만, 당초 기소도 어려울 거라고 봤던 것에 비하면 큰 성과죠. 성폭행 사건을 잘 아는 제가 청장이 돼서 억울한 피해자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정말 보람을 느꼈어요.
-당시 광주경찰청은 ‘사고청’이란 딱지가 붙어 있어 다들 가길 꺼렸다던데.
맞아요. 2007년 신설 이후 4년 만에 제가 여섯 번째 청장으로 갔어요. 한편에선 ‘이금형이 설치더니 광주까지 쫓겨가 저기서 끝나는구나’ 이런 말도 나왔다고 해요. 연고도 없고 출장도 한번 안 가본 곳이지만 진정성을 갖고 열심히 하면 될 거라 믿었어요. 제 인생관이 ‘항상 긍정적인 사고로, 자신감을 갖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자’거든요. 처음엔 참 힘들었어요. 아침에 직원들이 “잠은 잘 주무셨습니까?” 이러면 가슴이 싸~해져요. 전전 청장이 심장마비도 숨졌거든요. 관사에서 혼자 자면서 가슴에 약간 통矗?느껴져도 휴대폰 단축번호 1번(남편)을 눌러야 하나, 그래 봐야 서울에서 뭘 어쩌겠어, 112상황실에 연락하는 게 나을까, 119로 직접 할까, 별별 생각 다했어요.(웃음) 어둡고 푹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떻게 바꿀까 고민하던 차에 ‘광주의 어머니산’ 무등산 산신이 여신이란 얘길 들었어요. 회의 때 그랬어요. “내가 무등산 여신의 부름을 받고 왔다. 광주청 터가 음기가 센 곳인데 내가 다녀가면 좋은 일만 있을 거다.” 다들 반색하더라고요.
-여신의 부름이 효험이 있었나 보죠.
그럼요. 블랙홀이었던 광주청이 확 바뀌어 뭐든지 전국에서 1등 하고 그랬어요. 귀갓길 여고생 성폭행 사건 범인이 안 잡히기에 여신께서 이름만 팔아먹는다고 노하셨나 싶어 산신각 찾아가 절 올리며 빌었는데 놀랍게도 다음날 잡혔어요. 아, 오해할라, 저는 불자 아니고 기불카교(기독교ㆍ불교ㆍ가톨릭) 신자예요. 기관장 모임에서도 다들 “여신한테 우리도 좀 잘 봐달라 해달라” 그랬다니까요. 후임인 안재경 광주청장이 이번에 저랑 같이 치안정감(경찰청 차장)으로 승진했어요. 확실히 ‘여신 발’이 통한 거라고요.(웃음) 한반도도 음기가 센 지형이라는데 여성 대통령이 됐으니 나라 일도 광주청처럼 잘 풀리겠죠?
웬 여신 타령인가 싶지만 그만큼‘감천’할 ‘지성’을 쏟았다는 얘기다. 5ㆍ18 기념식 때면 전경기동대 3,500명 동원하던 것을 광주청 소속 7개 중대로 줄이고 6개 중대는 진압복이 아닌 경찰 근무복을 입혀 참석자 안내를 하도록 한 것도 그 중 하나다. 부임 이듬해에는 근무복을 검은 양복으로 바꿔 입게 해 경찰에 대한 불신과 반감을 줄였다. 난관도 적지 않았다. 경찰서 순환인사 제도를 단행하고 관행처럼 굳어 진 차도 점거 집회를 불허해 안팎으로 반발을 샀다. “직원들과 수 차례 간담회를 열고, 시민단체들을 일일이 찾아가 취지를 설명하고 설득했어요. 인심이나 얻겠다고 식물청장처럼 가만 있다 큰 사고 빵 터져 다같이 죽느니 당장은 욕 먹어도 할 일은 하자고 작정했죠.”
-결과적으로야 잘 됐지만, 가는 곳마다 직원들을 혹사시켜 원성도 있다던데.
여성청소년과ㆍ계 생기기 전부터 성폭력, 가정폭력 업무로 전국 파출소 직원들을 엄청 괴롭혔거든요. 저에 대한 원성은 ‘전국구’예요. 야간근무수당도 늘리고 인력도 충원해 그동안 고생한 직원들에게 보답하려고 경무인사기획관을 희망했던 건데 마무리를 다 짓지 못해 아쉬워요. 이임식 하면서 과ㆍ계장들한테 꼭 마무리를 지어달라고 당부했어요. 그러니 ‘이금형이 가면 다들 벌벌 떤다’ 이런 흉한 말 말고 덕담 좀 해달라, 나 철녀(鐵女) 아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 들으면 상처 받는 인간이다, 그렇게 좀 써주세요.(웃음)
-‘경찰청 대처’란 별명도 있잖아요. 대처가 ‘철의 여인’인데.
대처 수상을 좋아하긴 해요. 남편이 휴대폰에 제 번호를 ‘멋있는 대처’라고 저장해놨어요. 헤어 스타일도 대처랑 비슷하다는 거 아녜요.(웃음) 경정 시절부터 이 머리인데, 제복 입으니까 머리카락이 조금만 내려와도 싫더라고요. 드라이 하고 스프레이를 뿌려주면 머리 속까지 싹 정리되는 기분이 들어요. 두 달에 한번 정도 동네 미장원에 가서 퍼머를 하는데 그 시간도 그냥 보내기 아까워 머리에 봉지 쓰고 목욕탕에 때밀러 가요. 비싼 거냐고요? 아휴, 4만 원짜리예요. 화장 안하고 맨 얼굴로 퍼머 하러 갈 때면 남편이 (고향 마을 이름을 따) ‘배운동 댁’ 그래요. 영락없는 시골 아줌마 같다고.
-광주청장 있을 때 전경 기동대원들에게 그렇게 잘 해주셨다면서요.
제가 딸만 셋인데, 전경들 보면 제 아들들 같아요. 행여 고생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하실 부모님들 생각하면 더 마음이 가죠. 제 판공비 떼서 ‘한마당 잔치’ 열고 부대별 장기자랑 해서 상도 주고 했어요. 제가 이 근무복 입고 (양 손 엄지를 세운 채) 이러고 ‘남행열차’도 불렀잖아요. 애들이 다 쓰러져요.(웃음) 경찰대학에 와서 아들 430명, 딸 50명이 더 생겼어요. 간담회도 하고 생일도 챙겨주고 특강 들어가서 제가 경찰 생활 36년간 터득한 노하우도 다 가르쳐주고 싶어요.
-경찰대학에서는 또 어떤 일을 벌일 계획인가요?
112종합상황실 실습장을 만들려고 해요. 112지령실은 경찰 조직의 심장이고 혈관이거든요. 또 경찰청에서 운용하는 범죄지리정보시스템이나 신원불상자데이터베이스, 교통사고분석시스템 등을 연계해 수업에 활용하도록 할 계획이에요. 경찰 간부를 양성하는 곳인데, 현장 실무도 모르는 어린애가 간부랍시고 왔다고 직원들한테 욕 먹으면 안되잖아요. 바로 실전에 투입돼도 차질없이 일할 수 있도록 탄탄하게 가르쳐 보내야죠.
순경 출신이자 여성이라는 약점을 도리어 강점으로 바꾸며 전진해 온 그의 열정과 패기, 그리고 노련함이 더 높은 ‘유리천장’까지 뚫을 수 있을까. 여성 첫 서울경찰청장, 더 나가 여성 첫 경찰총수까지 노려볼 만하지 않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그는 펄쩍 뛰며 서둘러 자리를 떴다. “그런 말 꺼내지도 마세요. 저는 지금도 과분합니다.”
선임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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