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대사의 파견에는 엄격한 요건이 따른다. 제일 바람직한 외교관 상으로는 신학자, 군인, 법률가가 거론됐다. 주 로마교황청 대사를 보낼 때는 신학자가 이상적이지만, 비기독교 국가에 대사로 파견해서는 안 된다. 군인의 경우, 전쟁을 치르는 우방국에 대사로 보내는 것은 현명하나 평화를 추구하는 나라에 군인대사를 파견하면 큰 실책이다. 상대국의 궁정에 파견할 때, 특히 그 나라 궁정에서 실권을 쥔 귀부인을 포섭대상으로 삼는다면 젊고 미끈한 종마(種馬)형 군인을 대사로 파견해야 한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외교관 프랑솨 드 카리에르가 남긴 에 등장하는 이상적 대사의 요건으로, 중세이후 유럽에서 굳혀진 외교제도지만 지금껏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습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교황청에 파견하는 대사를 대사라는 직함대신 '넌쇼'라 부른다는 것, 따라서 그가 거주할 대사관도 엠버시라는 말 대신 '넌쇼가 사는 집'이라 부르고, 그가 주재할 나라의 공식대외명칭도 로마교황청 대신 '홀리 시'라 부른다는 것도 상존하는 제도다.
대사의 요건 못지않게 현지대사들 사이의 서열시비도 핵심과제다. 1768년 겨울, 런던 버킹검 궁전에서 무도회가 시작됐을 때다. 막 도착한 러시아대사가 입장하더니 맨 앞줄로 달려가 로마제국 대사의 바로 옆자리에 섰다. 조금 후 도착한 프랑스 대사는 일단 뒷줄에 서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앞줄로 돌진, 앞서 도착한 러시아대사를 밀어 젖히고 로마제국 대사의 바로 옆자리를 차지해버렸다. 두 대사 사이에 주위 사람을 경악시킬 정도의 설전과 욕설이 시작됐다. 두 대사 모두 본국 정부로부터 교황청에서 파견한 대사와 로마제국 대사를 제외하고는 어떤 나라의 대사보다 하석에 서서는 안 된다는 본국정부의 훈령이 시달되었기 때문이다.
설전은 드디어 결투로 발전, 두 대사가 칼을 빼들고 검술을 뽐냈고 결국 러시아대사의 부상으로 끝났다. 영국 외교관 어네스트 사토의 에 나오는 야담 같은 실화다. 대사의 서열은 지금은 부임 순으로, 유엔의 경우 국명의 알파벳순으로 바뀌었지만 이 서열제도 역시 상존한다.
파견국의 국가원수가 바뀌면 해외대사 모두가 바뀌고 유임의 경우에도 새 신임장을 주재국 원수에게 제정해야한다. 이 때 국가원수는 꼭 왼쪽 손으로 대사는 두 손으로 신임장을 주고받으며, 임명에 앞서 주재국의 사전 동의, 소위 아그레망이 필수적임도 굳혀진 관습이다. 박근혜 정부가 이 과정에서, 그것도 미, 일, 중, 러, 유엔대사 등 우리 외교의 핵심 '빅 파이브'대사를 사전 아그레망 없이 용감하게 발령 내는 촌극을 빚어 1주일 내내 외교가의 화제가 되고 있다.
더 가관은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는 청와대 인사관계자의 해명이다. 실수를 저질렀다는 이야긴데, 실수는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좋은 경험이라도 되지만, 실수가 결코 통하지 않는 분야가 외교임을 몰라서 하는 소리다. 이번 촌극을 본 서울주재대사들이야 점잖은 체면에 쉬쉬하겠지만 이들이 본국정부에 보낸 보고를 통해 이미 국제적 뉴스가 된 만큼 '빅 파이브'들이 나중에 주재국 정부나 현지 외교가로부터 당할 경멸과 조소를 과연 무엇으로 감당할 것인가. 청와대는 또 책임을 엠바고를 깬 언론 탓으로 둘러댔지만, 이 역시 웃기는 이야기다. 자기네 청와대 홈페이지에 먼저 띄운 자가 누군가.
이번 사안은 엄밀히 국제법위반이다. 모든 대사는 아그레망을 받은 후 임명해야하는 이 국제관습은 조약, 선언과 함께 국제법의 주요 법원(法源)이기 때문이다. 세련된 나라의 경우 아그레망의 요청에 앞서 이걸 요청해도 괜찮겠냐고 묻는, 소위 사전 아그레망까지 보냄이 국제관행이거늘 올해로 외교연령 65세 되는 한국외교사상 상상 밖의 대 망신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정부, 도대체 왜 이러는가!
김승웅 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swkim4311@naver.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