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친구를 살해한 뒤 낙지에 의한 질식사로 가장해 거액의 보험금을 가로챘다는 이른바 '낙지 살인사건'의 판결이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서울고법 형사4부(부장 문용선)는 5일 여자 친구 B(당시 21세)씨를 질식시켜 살해하고 보험금을 타낸 혐의(살인 및 사기)로 기소된 A(32)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대신 여자친구 사망과는 무관한 절도 및 권리행사방해 혐의에 대해서만 일부 유죄를 인정, 징역 1년6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코와 입을 막아 살해했을 경우 본능적인 저항으로 얼굴 등에 상처가 남게 되는데, 당시 건강한 20대 여성이던 B씨 몸에 그런 흔적이 있었다거나 B씨가 저항조차 못할 정도로 의식이 없었다는 점이 증명되지 않았다"며 "검사의 공소 사실이 합리적 의심이 없을 정도로 입증됐다고 볼 수 없어 살인 혐의와 살인을 전제로 하는 보험금 편취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B씨의 사망 원인에 대해 "피해자의 심폐기능이 정지됐을 당시 각종 조사나 검사, 부검이 이뤄졌다면 정지 원인을 밝힐 수 있었는데, 당시 경찰은 타살 의혹이 없다고 보고 아무런 조사를 취하지 않아 A씨 진술 외에는 사망 원인을 밝힐 아무런 법률적 증거가 없다"며 "A씨 진술처럼 B씨가 낙지로 인해 질식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앞서 1심 재판부는 ▦범행 현장에서 B씨가 평온한 표정으로 잠을 자듯 하늘을 향해 반듯하게 누워 있었던 점 ▦술자리가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점 ▦B씨 입에서 산낙지를 빼냈다는 A씨의 진술이 자주 바뀌는 점 ▦A씨가 구입한 산낙지가 해물탕용으로 쓰는 큰 것이어서 통째로 먹을 수 없는 크기였다는 점 등을 이유로 A씨가 현장에서 발견된 타월과 같은 부드러운 천을 이용해 술에 취한 B씨를 질식시켰다고 판단했다.
또 1심은 A씨가 당시 신용불량자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이었고, 보험설계사인 고모를 통해 B씨 앞으로 거액의 보험을 든 뒤 범행 보름 전 보험금 수령인을 자신으로 바꾼 점 등을 유력한 범행동기로 들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이에 대해 "범행 동기가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 보험과 관련한 A씨 진술을 납득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A씨는 2010년 4월 19일 인천 주안동 한 모텔에서 B씨가 만취한 틈을 타 질식시킨 뒤 보험금 2억원을 타낸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B씨는 A씨의 신고로 병원에 옮겨졌다가 16일 만에 숨졌고, 유족은 단순 사고사로 여겨 B씨의 시신을 화장했다. 그러나 A씨가 보험금을 타낸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경찰은 유족의 요구에 따라 사건 발생 5개월 만에 재수사에 착수했고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0월 A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날 텁수룩한 머리에 검은색 굵은 뿔테 안경을 끼고 수갑을 찬 상태로 법정에 나온 A씨는 무죄가 선고되자 방청석에 있는 지인들을 향해 눈 인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B씨의 아버지는 선고가 끝난 뒤 "재판부가 초등학생이 봐도 인정할 만한 정황 증거를 인정하지 않았다"며 "살인하는 장면을 찍어서, 아니면 살인 도구를 찾아서 주기 전에는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냐"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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