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왕립화학회 연구원이 안료의 발견에 따른 서양 화풍의 변화, 화가 인식과 대중 취향이 어떻게 바뀌어 가는지를 보여준다. "화가는 자신이 본 것을 문자가 아니라 그림을 통해서만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그 그림은 매개체(물감)가 드러낼 색상의 영역에 엄격히 얽매여 있다"는 곰브리치의 어록에서 시작해 고대부터 현대까지 서양미술사를 소개한다.
시중에서 튜브물감을 구할 수 있게 된 건 불과 50년 남짓이다. 고대 비밀리에 제조되는 안료들은 연금술사의 주요 상품이었고, 화가들은 안료를 얻기 위해 긴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18세기까지도 많은 예술가들은 화실에서 도제를 시키거나 직접 안료를 갈아서 혼합해 물감을 만들었다.
안료가 귀했지만 특히 유행한 안료는 따로 있었는데, 시대에 따라 달랐다. 중세 말 금박 벽화가 유행하면서, 화가들은 콩알만한 순금을 두드려 펴서 얇은 금박으로 만든 후, 그림 속 인물들의 옷과 소품을 장식했다. 하지만 얼마 후 황금을 사용하지 않고 비슷한 효과를 내는 기법을 보유한 화가들이 등장하자, 금박 벽화는 금세 종적을 감춘다. 당시 이보다 비싼 물감은 진한 보랏빛 청색의 광물성 안료 '울트라마린'으로 부유층들은 울트라마린을 비롯해 고급 안료로 그림을 그리기 원했다. 중세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그려진 제단화에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청색 옷을 즐겨 입고 등장한 데는 이런 세속적인 배경이 있었다.
이와 반대로 너무 가난해 갈색 염료 밖에 구할 수 없었던 화가 렘브란트는 갈색을 우아하게 표현해 당대 갈색을 유행시키기도 했다. 중세의 청색, 르네상스 시대의 선홍색, 근대 노란색 등 시대 흐름에 따라 '고급 색깔'은 정해졌다. 물감이 넘쳐나는 현대에서는 색상자체보다 발색, 비용 등이 더 주목 받는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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