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의 80여개 작은 섬으로 이뤄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BVI). 엄격한 비밀주의로 가장 성공적인 조세피난처로 꼽히는 이곳에서 역외회사나 역외계좌를 통해 재산을 은닉한 혐의가 있는 이들의 신원이 유출돼 전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이번 주 공개될 명단에 수천명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영국 일간 가디언이 4일 공개한 일부 명단에는 각국 정상의 가족 및 측근, 재벌 등 최고위급 인사들이 포함돼 전체 명단 공개에 따른 메가톤급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유출된 자료에는 BVI에 설립된 민간기업들의 최근 10여년 간 금융거래 내역이 담겨 있다. 가디언에 따르면 자료는 200만개의 이메일과 4개의 데이터베이스로 구성됐으며 12만2,000개 이상의 역외회사 및 신탁회사의 세부 정보, 1만2,000여명의 중개인 관련 기록이 담겨 있다. 260기가바이트 분량의 컴퓨터 파일인 이 자료는 하드디스크에 저장된 채 미국 워싱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에 배달됐으며 영국 가디언과 BBC방송, 프랑스 르몽드, 미국 워싱턴포스트 등 30여개 언론사가 취재에 참여했다. 자료를 유출한 사람의 신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한국 정치인 및 재벌이 명단에 포함됐는지 여부다. 박근혜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를 강조하는 가운데 최근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가 거액의 해외 계좌를 운용한 사실이 드러나 낙마하는 등 해외 은닉 재산이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른 상황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국에서 유출되는 자산 규모는 세계적 수준으로 추정된다. 영국 조세정의네트워크가 지난해 7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대부터 2010년까지 한국에서 해외 조세피난처로 이전된 자산은 7,790억달러(870조원)에 달한다. 중국(1조1,890억달러), 러시아(7,980억달러)에 이어 세계 3위 규모이며 2010년 한국 대외부채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베일에 가려진 조세피난처의 재산 은닉 규모도 이번 자료 유출로 윤곽을 드러낼 전망이다. 키프로스, 리히텐슈타인, 영국령 케이맨제도 등 50~60곳에 이르는 조세피난처에 자산이 이동하면서 발생하는 탈세 규모는 8조~21조달러(8,900조~2조3,340조원)으로 추정된다. 최대치인 21조달러는 전세계 국내총생산(GDP)의 30%에 해당한다. 영국 조세정의네트워크는 139개국 역외 금융을 분석, 2010년 현재 그 규모가 21조~32조달러에 달한다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역외 탈세를 막으려는 각국 정부의 노력에는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들은 2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다국적 기업의 세원 잠식과 소득 이전에 대응하는 대책을 개발하고 필요한 집단적 행동을 취하기로 했다"고 결의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7월까지 다국적 기업의 탈세 방지를 위한 행동계획을 마련하기로 했다. 독일 프랑스 등 유로존 11개국은 내년 1월부터 자국 금융기관 및 자국과 거래하는 모든 금융기관이 취급하는 주식, 채권, 파생상품에 금융거래세(토빈세)를 부과하기로 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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