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스트레스가 심하지 않아요. 수업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을 땐 학교 지원을 받아 동아리를 만들면 돼요. 학교 생활에 활력이 되죠.”
“튀는 행동을 용납하지 않는 학교 분위기에서는 입시 위주 수업을 하는 교사가 잘하는 교사예요. 하지만 교사들도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면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눈에 들어옵니다. 누구나 좋은 교사가 되고 싶어해요.”
위기의 일반고, 회생불가능일까. 교육과 학력을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보면 그렇다. 우수한 학생을 쓸어가는데다 입시학원으로 변질된 특목고∙자사고와의 경쟁은 애초 이길 수 없는 게임이다. 무기력이 습관이 된 교사와 학생, 10년 전이나 변함없는 주입식 수업 방식은 일반고를 더 깊은 수렁에 빠뜨린다. 하지만 입시에서 비껴나 공교육의 새로운 표준을 모색하는 ‘행복한 일반고’도 있다.
경기 화성시 병점고는 아침 등교하는 풍경부터 다르다. 교복이나 두발제한 등을 단속하는 교문지도가 없고 안전지도만 있다. 학교는 학생 스스로 규칙을 만들어 지키도록 하고 있다. 존중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바뀐다고 교사들은 말한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린다. 학생들의 요구로 벌점제조차 운영하지 않는 서울 강북구 삼각산고(혁신학교)의 백광원(18)군은 “선생님들이 담배 피운다고 야단치는 게 아니라 정말 속상해하면서 걱정해주니까 우리도 사람인지라 미안해서 담배를 안 피운다”며 “1학년 때는 소위 문제아였던 친구들도 학년이 올라가면서 머리도 얌전해지고 스스로 바뀌는 게 보인다”고 말했다. 혁신학교인 서울 강동구 선사고 강명희 교사도 “다른 일반고에 있을 때는 아침마다 교문 앞에 서서 아이들과 교복 치마 길이를 놓고 실랑이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며 “아이들이 교사를 보면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도망가기 바빴다”고 말했다.
인근에 자공고가 들어서면서 타격을 받았던 병점고는 입시 위주의 편법 운영 대신 학생의 진로를 찾도록 돕는 동아리를 활성화시키는 데서 돌파구를 찾았다. 이달훈 교장은 “학부모들이 ‘학생을 쥐어짜면서 가르칠 줄 알았는데 애가 축구부 동아리를 들어서 학교 가는 걸 신나한다. 아이들 즐겁게만 해달라’고 한다”고 말했다. 병점고에는 학생들이 스스로 만든 동아리만 14개가 있다. 외교관이 꿈인 김대희(17)군은 “우리 학교는 이과 쪽이 발달한 학교라서 아예 같은 꿈을 가진 친구들과 ‘디플로맷(Diplomat)’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다”며 “영자신문을 함께 읽고, 국제시사에 관한 토론과 글쓰기를 하면서 외교관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아리 활동을 통해 직접 진로를 찾아가는 경우다. 수학을 좋아하는 박해건(17)군은 수학문제를 만드는 동아리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를 만들었다. 박군은 “좋아하는 수학을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할 수 있어 학교 생활이 즐겁다”고 말했다. 활발한 동아리 활동은 학습동기를 유발하기도 한다. 영재고와 과고에 떨어지고 이 학교에 진학한 조준호(16)군은 “중학교 때까지 공부만 했기 때문에 다른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싶었는데 다른 학교에 간 선배들이 ‘공부 말고는 다른 거 할 시간이 전혀 없다’고 해 미련 없이 병점고에 왔다”고 말했다.
공부에 뜻이 없는 학생들에게는 공부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 공부해야 하는 이유를 주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사실도 여느 일반고에서는 잊혀진 교훈이다. 특성화고에 지원했다 떨어지고 서울 강북구 삼각산고에 온 정규민(18)군은 “공부를 해야 되는 이유를 찾지 못해서 학교에 흥미가 없었는데 이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저마다 색다른 방식으로 수업을 하시는데 재미가 있더라”며 “대학이 목표가 아니라 정말 배워야 하는 것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자사고를 썼다 떨어져 이 학교에 온 장유진(18)양은 중학교 때 본문을 통째로 외우는 식으로 공부를 했다. 고교에 와서 원리 위주의 수업을 들으면서 4등급이었던 모의고사 성적은 1등급까지 올랐다. 장양은 “자사고에 갔더라면 성적이 오히려 떨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교사들은 “중학교 때부터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 아니어도 스스로 동기부여가 되면 학업성적이 크게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런 학교들의 교실 풍경이 여느 일반고와 다른 것은 이 학교들이 자율권을 행사하며 교사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주기 때문이다. 지역에 공립학교를 지어달라는 시민의 요구로 2004년 문을 연 병점고는 지난해까지 매년 2억원씩 시의 예산 지원을 받아 행정업무를 전담하는 인력을 따로 뽑고 교사 동아리와 교과연구모임을 지원했다. 교과운영에 자율권이 주어지는 혁신학교인 삼각산고와 선사고의 경우는 수업연구가 활발하다. ‘기후변화’ 등을 주제로 사회, 과학, 영어 등 과목간 통합프로젝트 수업도 대표적이다. 강명희 교사는 “일반 학교에서는 수업에 변화를 주려고 해도 눈치가 보이고 어려웠지만 혁신학교에서는 교사들이 공교육의 위기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고 말했다. 김정안 교사는 “일반고에서는 서로 수업에는 안 들어가는 게 예의지만 여기서는 수업을 개방하고, 언제든 들어가서 보고 배운다”고 말했다. 교사들 스스로 자존감과 성취감이 높아지면서 학생들도 수업에 흥미를 느끼는 선순환에 돌입했다.
이달훈 병점고 교장은 “일반고는 대학가는 정거장이 아니다”라며 “학생과 교사가 오는 데 즐거운 학교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민주적인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권영은기자 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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