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피난처로 잘 알려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BVI)에서 수백만 건의 내부 자료가 유출돼 이곳에 재산을 은닉해온 수천 명의 신원이 처음 공개됐다. 대통령 친인척, 재벌, 독재자의 딸 등 각국 고위층이 대거 포함된 데다 국적도 미국, 중국, 영국, 캐나다,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이란, 태국, 구 공산권 국가 출신 등으로 폭넓어 후폭풍이 예상된다.
미국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 등과 공동으로 자료를 입수 분석한 영국 일간 가디언은 컨설팅업체 맥킨지의 전직 수석 이코노미스트의 추산을 인용해 “자료에 드러난 은닉 재산 규모가 32조달러(3경5,949조원)에 달한다”고 4일 보도했다. 자료 분석 결과는 이번 주 발표될 예정이다.
가디언은 이날 재산 은닉 사실이 드러난 명사들을 일부 공개했다. 이중엔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의 친구이자 지난해 올랑드 대선캠프의 공동 재무담당자였던 장 오기에가 포함됐다. 오기에는 취재진에 또다른 조세피난처인 영국령 케이맨제도에서 활동하는 중국인 사업가와 합작해 BVI에 역외회사를 설립했다고 털어놨다. 올랑드 대통령은 제롬 카위작 예산장관이 탈세 및 돈세탁 의혹으로 장관직을 사임한 데 이어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입을 전망이다.
바야르적트 상가자브 몽골 부총리는 재무장관 재임 당시 BVI에 역외회사를 설립하고 스위스은행 계좌를 개설한 사실이 드러났다. 상가자브는 “부총리직 사임을 고민하겠다”며 정계은퇴 가능성을 밝혔다. 알함 알리예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은 두 딸 명의의 역외회사가 설립된 사실이 밝혀져 곤경에 처하게 됐다. 이고리 슈발로프 러시아 제1부총리의 부인도 역외회사 지분을 갖고 있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 필리핀 독재자였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장녀, 캐나다 상원의원의 남편도 재산 은닉 혐의를 받고 있다.
최근 숨진 러시아 재벌 보리스 베네조프스키와 절친했던 영국 백만장자 스콧 영도 BVI 역외회사를 통해 러시아의 유망기업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스 스페인 출신의 유명 미술품 수집가 티센 보르네미사도 그림 구매 과정에서 역외회사를 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가디언은 이메일 200만건을 비롯한 입수 자료에 BVI에 설립된 민간기업들의 최근 10여년간 거래 내역이 포함됐다고 전했다. 가디언은 BVI의 역외기업 소유주 신원이 드러난 것은 처음이라며 이곳은 세계적 조세피난처로 부상한 1980년대 이래 당국자도 기업 소유주 신원을 모를 만큼 철저한 비밀주의를 고수해왔다고 전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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