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시들은 '쉽게 씌어진 시'로 쉽게 오해 받는다. 일상에서 길어 올린 비유와 지시하는 손끝의 향방이 정확한 상징, 호흡을 거스르지 않는 입말, 핵심을 향해 돌진하는 단순한 명료성…. 모두 태생적으로 모호함을 선호하는 시와는 불화하기 쉬운 항목들이다. 이 항목들을 덕목으로 갖춘 시인의 시는 그러므로 늘 쉽게, 마구 씌어졌다는 오해의 자장에 놓여 있다. 시인 최영미(52)의 시가 아마 그런 운명일 것이다.
최영미 시인이 새 시집 (실천문학사 발행)을 펴내고 3일 기자들과 만났다. 등단 21년째, 4년 만에 내는 다섯 번째 시집이다. 시는 여전히 솔직하고 거침없고 도발적이다. 시인은 "그건 인간에 대한 평가이지 작품에 대한 평가가 아니지 않냐"고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지만, 이 엄연한 정서적 쾌감과 인지의 충격을 예술적 효과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50만부를 훌쩍 넘는 경이적 판매고로 시작부터 스타 시인이었던 그에게 첫 시집 (1994)의 그림자는 길고도 짙다. 그는 "첫 시집으로 하도 거칠다는 말을 많이 들어 언어의 조탁과 정련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며 "날것처럼 보이는 표현들도 적어도 다섯 번은 고쳐 쓴 것들"이라고 말했다.
유별나게 자연인 최영미와 시적 화자의 분리가 어려운 그의 화법은 풍자시와 연애시에서 가장 두드러진 시적 효과를 거둔다. 시인에 따르면, 정치인들은 '왼손이 하는 일은 반드시 오른손이 알게 하고/ 보도되지 않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여우들'('정치인')이며, 신은 '우리를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어 놓고// 구름 속에 편안히 앉아서/ 땅을 내려다보는// 태초에 죄인'('고해성사')이다. '북조선에서는 잘 우는 사람이 출세하고/ 남한에서는 적당한 웃음이 성공의 비결'('닮은꼴')이라는 이 신랄하고 냉소적인 진실. "냉소의 기술을 모른다는 것이 인간 최영미의 최대의 약점" 이라며 억울하다는 반응이지만, 냉소의 미학이야말로 시인 최영미의 가장 든든한 자산 중 하나일 것이다.
이번 시집에 실린 시들은 절반 이상이 춘천에서 살며 쓴 것들이다. "심플리(simply) 돈(주택대출금 이자) 때문에"4년간 춘천에 살았던 그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유유자적하게 살리라"는 여유와 관조로 세상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했지만, 이내 그리운 것이 너무 많아져 지난해 다시 대도시의 번잡 속으로 자청해 들어왔다."소외된 지역 문인으로서, 완전히 잊혀진 시인이 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도 한몫 했다.
이번 시집은 "글로는 사기를 못 치는" 시인 최영미가 연애의 세계로 귀환해 쓴 시집이라는 점에서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 연애를 하지 않고 쓴 최초이자 유일한 시집이었던 네 번째 시집 은 스스로 돌아보면 건조했다. 다시 연애의 한복판에 선 시인은 노래한다. '아름다움을 버리고 돌아와 나는 울었다'고, '너는 차가웠고, 나는 뜨거웠고, 내 인생의 위험한 태풍은 지나갔다'고, '아침에 가장 늙었고 저녁이면 다시 젊어진다'고.
3년간 양친의 병수발을 들며 죽음의 가장 가까이에 가봤던 그가 쓴, 이번 시집의 가장 좋은 시 한편을 보자. '이미 젖은 신발은/ 다시 젖지 않는다// 이미 슬픈 사람은/ 울지 않는다// 이미 가진 자들은/ 아프지 않다// 이미 아픈 몸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미 뜨거운 것들은/ 말이 없다'('이미') 이것이 쉽게 씌어진 시일까.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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