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잘 모르는 듯한 A와 B가 거리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다. "(A)알았어요, 정 그렇다면 미안하다고 할게요. (B)미안하다면서 왜 그렇게 당당한 거요. (A)잘못했다고 사과하는데 왜 계속 시비를 거는 거요. (B)지금 그게 사과하는 거요. (A)아니, 사과했는데 또 뭘 더 하라는 거요, 그만 합시다. (B)당신의 말이 진짜로 사과하는 게 아니잖아요."
결국 A와 B는 화해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무엇 때문에 시비가 일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A가 뭔가 사과해야 할 일을 했고, B는 사과를 받으면 더 이상 문제삼지 않으려 했던 상황이었던 듯 했다. 하지만 A는 A대로 '사과를 했는데 계속 시비를 건다'는 생각에 불쾌해 했고, B는 B대로 '사과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건성으로 흉내만 낸다'는 생각에 불쾌해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짐작대로 그들은 서로 알던 사이가 아니었고, 그래서 앞으로 다시 만날 관계도 아니었다. 더 이상 싸움이 번지지 않고 서로 께름칙해 하면서 일단락 된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A와 B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부대껴야 할 관계라면 얘기가 다르다. 사과할 일이야 언제라도 생길 수 있는데, 그 때마다 이런 식으로 넘어가다가는 서로에게 남은 불쾌감과 스트레스는 쌓이고 응축되어 진짜 싸움으로 번지게 될 것이다. 더구나 그 A와 B가 태생적으로 동일체와 다름없는 정부와 국민의 관계라면 더욱 그렇다. 지난 주말 청와대가 국민을 향해 내놓은 '미안하다, 사과한다'는 말은 그래서 그냥 넘기기 어렵다.
공휴일 아침 청와대대변인이 불쑥 기자실에 나타나 청와대비서실장의 사과문을 대신 읽었다. "새 정부 인사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인사위원장(청와대비서실장)으로서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앞으로 인사검증 체계를 강화해 만전을 기하도록 하겠다." 딱 두 줄, 17초 걸렸다. 앞서 A의 태도가 연상됐으니 "알았다, 사과하겠다, 미안하다" 정도가 된다. 오다가다 맞닥뜨리게 된 B를 향해 '정 그렇다면 사과하겠으니 이제 그만하자'고 말하는 뉘앙스가 그대로 전달됐다.
국민을 위해 일하느라 모인 집단이 정부며, 정부의 최고 지휘부가 청와대일 것이다. 그 청와대가 국민을 향해 이런 식의 사과문을 내놓게 된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굳이 짐작한다면 국민을 함께 지내야 할 관계로 여기지 않고, 오다가다 만나는 A와 B의 남남관계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주면 주는 대로 받아야 하는 주종관계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앞으로 국민과 청와대는 그렇게 위상을 정하고 지내자는 별도의 암시를 보낸 것은 아닌지. 이번 사과는 국민을 향해 한 것이 아니고, 그날 오후에 있을 당ㆍ정ㆍ청 워크숍을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해 여당을 다독거리기 위한 목적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다.
앞의 A와 B처럼 다시 보지 않을 경우라면 우연히 발을 밟혀서 다퉜든, 고의로 눈을 흘기다가 다퉜든 사과를 하고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무마될 여지는 있다. 하지만 청와대와 국민 사이에는 그럴 수 없다. 여차여차한 사정이 있어서 그리 되었다, 마음이 상했음을 이해하고 있다, 이런저런 방안으로 재발방지 노력을 하겠다는 정도의 진성과 애정은 최소한 담겨 있어야 '대국민 사과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결국 국민은 스스로 선출한 새 정부, 새 청와대로부터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한 셈이 됐다. '인사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인사위원장인 청와대비서실장의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마음을 전달받지 못했다. '국민에게 끼친 심려'는 한 톨도 덜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불쾌감과 스트레스만 응축돼 쌓였다. 매일매일 만나고 같은 동심원을 그리고 있는 국민과 청와대가 이렇게 께름칙하게 함께 있을 순 없다. 아예 정을 떼고 남남처럼 지내지 않을 것이라면, 지난번 사과에 대한 사과라도 해야 할 상황이다.
정병진 주필 bjju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