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상은 캐면 캘수록 여러 쓰임새를 찾을 수 있는 거지요."
철학은 서양의 전유물이고 한국에 도대체 철학이라는 게 있기나 하느냐는 이야기를 대놓고 듣던 시절에 퇴계 연구를 시작한 윤사순(77) 고려대 명예교수는 2일 유학의 매력을 이렇게 말했다.
한국철학 2세대를 대표하는 윤 교수가 최근 (지식산업사 발행)를 냈다. '한국 유학의 특수성 탐구'라는 부제를 붙인 모두 2권 분량 1,200쪽의 책에 기원전 2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국내에서 유학 사상의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윤 교수는 책에서 한국 유학의 특수한 현상을 크게 세 가지로 꼽는다. 우선 중국에서 유학이 전파된 뒤 수용까지의 기간이 매우 길었고 12세기 전후에 초기 성리학이 한국에서도 발흥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학문적인 내용으로는 16세기에 천명(天命)에 대한 연구와 그 과정에서 이어진 성리학적 논쟁을 동아시아 전체 유교권에서 보기 드문 사례로 본다.
"16세기 천명에 대한 연구를 하다 사단칠정 문제가 부각돼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논변이 18년간 이어집니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도 6년간 성리학의 주제를 놓고 논쟁을 했죠. 그런 분위기가 19세기 말까지 이어집니다. 이 논쟁들을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 못한다면 유학자로는 수준 이하 취급 당할 정도였죠. 그런 토론이 학파까지 낳았던 겁니다."
성리학에서는 의(義) 또는 의리(義理)를 강조한다. 주로 임금에 대한 충성이다. 윤 교수는 그런 전통 자체는 "중국이나 한국이 마찬가지"라면서도 그 가운데도 한국 유학의 독특함이 있다고 한다. "의병장이 궐기 격문을 쓸 때 임금을 옹호하는 근왕정신을 앞세우는 게 일반적이지만 조선에서는 그렇지 않은 의병장이 나왔습니다. 임진왜란 때 박광전이나, 한말의 기삼현은 '민생'을 앞세웠고 이런 겨레의식이 박은식, 신채호 같은 저항적 민족주의의 토양이죠."
책에는 부록으로 전통시대의 유학이 현대에는 어떤 쓸모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를 논한 시론 성격의 글이 붙어 있다. 중국 학자들의 요청으로 중국 실학 학술대회에 먼저 발표했다가 나중에 국내에도 번역 소개한 논문이다. 거기서 그는 "퇴계 이후의 성리학자들은 경(敬) 공부를 내세워 자기 안에서만 참다운 자신을 만든다는 수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성실함으로써 나를 자각하면서 남을 인정할 줄 아는 성(誠)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치 지도자의 경우라면 자기 원칙만 고집해서는 안 되고 여론에 귀를 열고 소통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이 책은 학술진흥재단이 자연과학분야에 한정했던 우수학자지원사업을 인문사회분야로 넓힌 첫 해인 2006년 지원 대상으로 선정돼 5년여 만에 완성했다. 윤 교수의 평생에 걸친 한국 유학 연구의 총결산이나 마찬가지다. 술술 읽히는 편이지만 "내용이 깊어서 대학원생 이상이 읽기에 맞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래서 유학에 흥미가 있는 독자들이 기대할만한 것은 사실 윤 교수의 다음 작업이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이번 책을 줄여서 대중들이 읽을 수 있고 서양학자들이 한국 유학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책을 새로 쓰고 싶습니다. 펑유란이 자신의 를 요약해 새로 책을 낸 것처럼."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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